유배 온 천재 학자가 남긴 귀한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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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세한도와 대정향교 의문당
역관 이상적에게 보낸 선물
중국서 귀한 책 보낸 제자에게
보답으로 걸작 ‘세한도’ 남겨
2020년 국립박물관에 안착

제주 학동들 격려한 서체
대정향교 ‘의문당’ 현액 제공
바른 학문 바라는 해서체
국보 80호 세한도. 세한도는 제주에 유배 온 추사가 중국에서 귀한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담아 전한 그림으로 1844년 그려졌다.
국보 80호 세한도. 세한도는 제주에 유배 온 추사가 중국에서 귀한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담아 전한 그림으로 1844년 그려졌다.

▲국보(國寶) 세한도(歲寒圖)의 탄생

추사는 절해고도의 풍토병에 시달리며 음식을 먹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유배기간 자기성찰에서 오는 깨달음을 얻으며 제주의 소박한 밥상에 적응해 나갔다. 차 생활과 독서가 그의 나날이었다. 특히 역관인 이상적은 권력을 잃은 스승에게 중국에서 구한 책들을 보내주곤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보냈다. 국보 80호인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에 유배 온지 5년째인 1844년에 그려졌다. 

세한도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꼽힌다. 세한도는 단출한 그림이다. 가로 69.2㎝, 세로 23㎝로 작은 화폭에 소박한 집 한 채와 소나무와 잣나무 네 그루를 그렸다. 중국에서 구한 귀중한 책을 바다 건너에 있는 스승에게 보내준 제자의 깊은 정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린 것이다. 

세한도의 또 다른 진가는 그림 뒤에 붙은 중국과 조선 명사들의 시문(詩文)인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 제찬과 독립운동가인 이시영·정인보의 찬시이다. 이상적은 중국 연경(현 베이징)에 가는 길에 스승의 그림을 중국 학자들에게 보여주었고, 이에 청나라 문인 16명이 앞다투어 추사와 제자의 후조(後凋)를 예찬하는 글을 지었다. 그래서 세한도는 15m의 두루마리 대작으로 완성됐다. 

세한도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다. 이상적에 이어 그의 제자 김병선, 김병선의 아들 김준학,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와 그의 아들 민규식, 192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한국에 온 일본학자 후지쓰카 등이다. 후지쓰카의 동경대 박사학위 논문은 ‘청조문화의 동점(東漸)과 김정희’였다. 논문의 결론은 ‘…이리하여 청나라 학문은 조선의 영특한 천재인 추사 김정희를 만나 집대성되었으니, 청조학 연구의 제1인자는 김정희…’라 할 정도로 후지쓰카 교수는 김정희에 심취해 있었다. 김정희 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사 모은 그는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서예가이자 당대의 서화수집가인 손재형은, 1944년 세한도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2개월간의 끈질긴 방문과 설득 후에 후지쓰카로부터 무상으로 세한도를 넘겨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며칠 후 미군기의 폭격으로 일본학자의 집은 파괴됐다. 구사일생으로 세한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후일담이다. 

1949년 국어학자 정인보, 독립운동가 이시영과 오세창이 세한도를 보고는 다음의 찬시를 적었다. 

이시영의 시=‘이 그림을 보며 수십년 동안 고심에 찬 삶을 산 선열들이 떠올라 삼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정인보의 시=‘그림 한 폭 돌아옴이 조국강산 되찾을 조짐임을 누가 알았겠는가.’

서예가이자 수집가인 손재형은 일본에서 극적으로 구해온 세한도를 한 개성상인에게 팔았고, 거상 손세기가 그로부터 세한도를 1960년 사들였다. 드디어 올해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91)이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 

추사의 자화상으로 불리는 세한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정희의 삶처럼 고난의 여정을 마치고 2020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됐다. 

위의 후지쓰카의 아들은 부친의 논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했고, 부친이 모은 나머지 추사 자료 2000여 점을 2007년 과천문화원에 기증했다. 정부에선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그는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대정향교 의문당 현판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 현재 제주추사관에 보관돼 있다.
대정향교 의문당 현판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 현재 제주추사관에 보관돼 있다.

▲추사유배지와 의문당

추사 김정희는 안동김씨의 정치적 모략에 의해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돼 55세에 대정현에 유배돼 9년 여를 지냈다. 김정희는 1840년 9월 한양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에 대정현에 도착했다. 다음은 완당선생전집에서 발췌한 글이다. 

“… 석양 무렵에 제주성의 화북진 아래에 당도하였다. 그런데 구경 나온 제주사람들은 모두 말하길, ‘북쪽의 배가 날아서 건너왔수다. 해 뜰 무렵에 출발하여 석양에 당도한 것은 61일 동안 보기 드믄 일이우다’라고 했고, ‘오늘의 풍세가 배를 이토록 빨리 몰아칠 줄은 생각도 못해수다. ’라고도 했다.… 배가 정박한 곳으로부터 주성까지의 거리는 10리였는데, 그날은 화북진 밑의 민가에서 유숙하였네. 다음 날 아침 성에 들어가 아전인 고한익의 집에 주인 삼아 있었는데, 이 아전은 배 안에서부터 고생을 함께 하며 왔었네. … 대정은 주성의 서쪽으로 80리쯤의 거리에 있는데 그 다음 날 큰 바람이 불어 전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다음 날은 바로 그 달 초하루였네. 그런데 이 날은 바람이 불지 않으므로 마침내 금오랑과 함께 길을 나섰는데 그 길의 절반은 온전히 돌길이어서 인마가 발을 붙이기 어려웠으나 그 길의 절반을 지난 이후로는 길이 약간 평판하였네. 그리고 또 밀림의 그늘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 빛이 겨우 실날만큼이나 통하였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들로 겨울에도 새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차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내지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으로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운치가 있었겠는가.”

강도순 종가였던 추사 적거지에서 사용한 제기.
추사유배지에서 사용됐던 제기.

추사유배지에는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됐다. 김정희가 머물렀던 적소는 그의 제자이기도 한 대정고을 유생 강도순의 집이었다. 강도순의 증손자는 일제시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이며, 해방 직후 남로당 조직부장을 지냈던 강문석이다. 또한 강문석의 사위는 4·3 당시 무장대 총사령관을 지냈던 이승진(일명 김달삼)이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 등을 전수했다. 그에게 사사한 김구오·강도순·박계첨 등은 제주필원으로 추앙되고 있다. 

추사유배지에는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던 초가 4채가 말끔하게 단장돼 있으며, 2010년 5월 추사의 제주 유배기간에 이룩한 업적을 기념해 제주추사관이 개관됐다. 

당시 유흥준 전 문화재청장의 선도적인 노력이 있어 다시 지을 수 있었다. 추사기념관과 전시실 3곳에서는 추사의 시·서화 등,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진본이 추사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 의문당 현판은,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대정향교의 동재에 걸려 있었다. 

대정향교는 조선 세종 때 세워진 향교로서 명륜당의 현판은 대정현감을 지낸 변경붕이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들었으나, 동재의 현판인 의문당은 당시 제주에 유배 중인 김정희에게 부탁해 받은 글씨이다. 동재는 학동들의 기숙사이기 때문에 평소 학문하면서 의심나는 것을 자주 질문하라는 격려의 의미가 의문당에 담겨 있다. 

김정희는 글을 쓸 때 바른 학문을 바라는 마음에서 정갈하고 반듯한 해서체로 썼다. 1846년 대정향교 훈장인 강사공이 김정희에게 간청해 의문당이란 현액을 받아 게재했던 것이다. 글은 향원 오재복이 새겼고 공자 탄신 2479년 무진 봄에 다시 현액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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