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예술가는 가난하고 고독해야”…황톳빛 제주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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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시지, 日 광풍회전 최연소 최고상…귀향 후 ‘제주화’ 열중
 변악, 한림읍 명월리 출신으로 정조 때 여러 차례 좌수 역임
 변태우, 의사·독립운동가…일군 정보 전하다 체포 후 옥고
 변호찬, 종교 항일 활동…고문 후유증으로 광복 1달 전 사망
변시지作, 폭풍의 바다(1991).
변시지作, 폭풍의 바다(1991).
변시지 作, 자화상 1995.
변시지 作, 자화상(1995).

▲변시지邊時志:1926(일제강점기)~2013, 화가, 제주대 교수,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光風會’와 ‘日展’ 입선, 호는 우성(宇城), 본관 원주, 서귀포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부인 이학숙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대한민국 국민훈장(國民褒章)을 수훈했고, 제주도문화상, 일본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했다. 

광풍회 정회원 심사위원, 국립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전(敎授展), 제주미술대전심사위원장, 서귀포시 종합미술관·기당미술관 명예관장 등을 역임했다.

서귀포시 서홍동(홍로)에서 태어난 변 화백은 6세 때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소학교 2학년 때 학년 대표로 씨름대회에 나가서 4학년과 시합을 하다가 오른쪽 다리 관절에 손상을 입게 된다. 이 때문에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작품에 진실을 담아내려면 예술가는 가난하고 고독해야만 한다.”는 평소 지론(持論)처럼 작품을 위해 철저히 고독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오사카(大阪)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도쿄(東京)에서 일본 화단(畵壇)의 대가인 ‘데라우치-만지로’의 문하생이 되고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光風會’와 ‘日展’ 입선에 이어 제34회 광풍회전(展)에서 23세 때 최연소(最年少) 최고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에는 심사위원 자격을 얻는다.

그는 1957년에 귀국길에 올랐다. 고국에서 새로운 미술세계를 모색하려고 귀국했지만 평소 올곧고 개혁적인 화백(畵伯)에게 고국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지연과 학연 등으로 얽힌 국전(國展)이 변해야 실력 있는 화가들이 배출된다는 믿음으로 개혁을 주도하다가 화단의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변화백은 서울대학교를 거쳐 서라벌(徐羅伐)예술대학 학장(學長)을 역임하며 한국미(韓國美)의 운형(原形)을 찾기 위해 세계성과 민족성 그리고 예술과 풍토에 대해 심층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미의 원형인 섬세함과 우아미(優雅美)를 고궁(古宮)에서 발견하고 15년간 매일 비원(秘苑)을 드나들며 비원 풍경을 그렸다. 한국미를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화법을 과감히 버리고 정자와 그 주변 풍경들을 극사실주의 화법으로 그려나갔다. 

당시 비원풍(秘苑風) 그림들은 일본의 컬렉터들에게 단연 최고의 인기였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늘 새로운 화법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즈음 제주대학교의 강의 요청으로 일시적으로 44년 만에 귀향했다. 유년시절의 제주풍광이 되살아나면서 제주의 풍토를 그려내고픈 강렬한 창작 욕구로 3년만 작업하고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상경하려던 것이 길어져 평생을 제주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창작 활동을 했다. 비로소 제주화풍의 색과 형이 탄생됐다. 이로써 제주의 자연은 추상화되고 새롭게 재창조돼 황톳빛 하늘과 바다에 제주를 대표하는 초가, 까마귀, 말, 돌담, 바람과 같은 아이콘이 먹색 선으로 최대한 단순화되기에 이른다. 

그의 제주화(濟州畵)는 한국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면서 1997년 ‘피카소’, ‘고흐’와 나란히 세계적인 100대 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2007년에는 ‘세계적인 감각으로 제주를 표현한 점을 인정받아 ‘스미소니언’박물관에 동양인 최초로 ‘난무(亂舞)’와 ‘이대로 가는 길’두 작품이 상설 전시된다. 생전 마지막 전시는 2012년 대전(大田)시립미술관에서 있었던 ‘제9회 이동훈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이다. 

변 화백(邊畵伯)은 2013년 6월 8일 향년 88세에 떠나갔다. 

▲변악邊岳:1788(정조12)~?, 천문의 명인, 향장, 호는 쌍계(雙溪), 본관은 원주.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났다. 잘 알려져 당대를 풍미했다. 정조 때 여러 차례 좌수(座首)를 거쳤다. 좌수란 지방의 주(州)·부(府)·군(郡)·현(縣)에 두었던 향청의 우두머리를 뜻하는데 1895년(고종32)에 향장(鄕長)으로 고쳐 불렀다.

▲변태우邊太祐:1899(광무3)~1950(분단시대), 독립운동가, 의사, 제주도 천주교 신도 및 신부의 항일 활동, 모슬포에 보창의원 개업,  1993년 건국포장 수훈, 광복 후에 광주로 이주, 본관은 원주.

변양근(邊良根)의 차남으로 본적은 대정읍 하모리(모실-개)이다. 산북 이도리(제주-성안) 1429번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도가 돼 제주성당(남문통 소재)에 소속돼 있었다. 

1922년 의생 장한규(張漢奎)의 차녀와 결혼하고 1923년 의생(醫生)시험에 붙었다. 1937년 한지의사(限地醫師) 시험에 합격했다. 

1938년 가을에 제주성당 소속 아일랜드 선교사 손신부(孫神父·본명 다위슨 패트릭)로부터 대정읍 모슬포 소재 해군 비행장의 면적, 주둔군 인원, 비행기 수 등에 관한 질문을 받고 아는 대로 상세히 답변해 주었다. 

이에 앞서 모슬포 군용 비행장의 모습과 내용이 외국 잡지에 사진과 함께 게재된 관계로 일본 군부에서는 전시 하에 어떻게 이런 군사 기밀이 적성(敵性) 국가에 누설되었을까 하고 범인 색출에 혈안이 돼 우선 서양 사람인 신부와 한국인 신도에게 의심을 두었다. 

1940년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渡洋爆擊)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하고자 해, 우선 적성국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군사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모슬포 공의(公醫)로 종사 중 1941년 10월경 일경에 의해 체포됐다. 

외국인 신부 3명과 평소 반일감정이 있는 신도 35명을 구인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이를 조사했다. 

결국 외국인 신부 3명과 한국인 신도 10명이 기소되고 그 중 1명은 재판이 있기 직전에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했다.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조국이 광복되면서 전라남도 광산(光山)군 대촌면의 보건소장으로 발령받아 생활근거지를 광주로 옮겼다. 1948년 광주 시내에 월산(月山)의원을 개업했다.

변태우는 고문의 여독과 옥중생활에서 시달린 관계로 2년 후 광주 자택에서 사망했다. 

▲변호찬邊鎬燦:1883(고종30)~1943(일제말), 미륵(彌勒)교의 항일 활동, 순사(殉死), 본관은 원주.

변덕승(邊德昇)의 아들로 산북 애월읍 금덕리(유수암)에서 태어났다. 미륵교는 우리나라에 앞으로 미륵불이 나타난다는 희망의 신앙이다. 그때가 되면 이상적인 국토로 변한다고 믿는다. 

그는 1940년 7월 28일 양붕진의 집에서 강증산 서거 기념제를 거행하면서 일제 당국에 노출돼 1942년 핵심 신도들과 함께 검거됐다. 

그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5년 7월 16일 조국이 광복되기 1개월 전에 사망했다. 

나머지 핵심 신도 양붕진梁鵬進(53, 오라), 양계초梁啓超(39, 상가), 송태옥宋泰玉(54, 도남), 이두생李斗生(54, 강정) 등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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