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생활 외로움…꽃·차에서 위안 얻다
고립생활 외로움…꽃·차에서 위안 얻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82) 제주서 잡초로 여긴 수선화
자신 처지 빗대 시로 표현해
다도문화 3대 거성 중 한 명
초의선사에 차 전해받곤 해
직접 황차 만들어 마시기도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부’. 당시 제주에서는 수선화를 소도 안 먹는 잡초로 여겨 뽑아 버렸다. 추사는 제주 사람들이 수선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것을 자신의 가련한 처지에 빗대어 시를 짓곤 했다. 사진=제주 추사관 제공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부’. 당시 제주에서는 수선화를 소도 안 먹는 잡초로 여겨 뽑아 버렸다. 추사는 제주 사람들이 수선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것을 자신의 가련한 처지에 빗대어 시를 짓곤 했다. <사진=제주 추사관 제공>

▲대정 유배시에 쓴 추사 김정희의 시

다음은 김정희가 쓴 대정 마을에 대한 시 ‘대정촌회(大靜村會)’이다. 

알록달록 종이 위에 / 붉고 검은 글씨들이 여기저기 어지럽다 / 관청의 문서들은 색깔도 선명하여 / 벽에다가 붙여 놓자 시를 보는 듯하구나

대정현에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시의 초고이며 완당전집 10권에 수록돼 있다. 제주 유배 시 초라하고 궁핍한 시골집의 방 모습이다. 관청의 공문서를 마치 대단한 문서처럼 벽에 붙여 놓고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하는 모습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다음은 수선화 ‘몰마농(말마늘)’에 대한 시이다. 수선화는 물에 떠 있는 신선이라는 뜻을 지닌 꽃이나, 당시 제주에서는 수선화를 소도 안 먹는 잡초로 여겨 뽑아 버렸다. 수선화는 설중화라고도 하며 자존심과 자기애를 뜻하기도 하고 제주에서는 금잔옥대라고도 한다.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김정희와 닮았다. 제주 지천에 널린 수선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것에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 그윽하고 담백하여 감상하기 그만이다 / 매화나무 고고해도 뜰 밖 나기 어렵지만 / 맑은 물에 핀 수선화 해탈 신선 너로구나 / 멍청한 사내놈들 신산(한라산)까진 못 갔던지 / 곧고도 미끈한 게 예 알던 모습일세 / 세상 모든 하늘 꽃은 물들지 않지마는 / 세상에 내려와서 온갖 설움 겪는구나 / 몇 해 전에 수선화를 캐내라고 하였다 / 푸른 바다 파란 하늘 웃음이 절로 난다 / 선연은 아무래도 맺어지기 마련인가 / 호미 끝에 팽개쳐진 평범한 이 물건을 / 햇볕드는 창문 옆의 책상 위에 모셔둔다 / 수선화가 곳곳에 여기저기 널려있다 / 밭고랑 사이에 더욱 무성한데 / 이곳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고 / 보리갈이 할 적에 모두 뽑아 없앤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추사 김정희의 제자 허련이 제주에서 유배 중인 스승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추사 김정희의 제자 허련이 제주에서 유배 중인 스승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수선화를 해탈한 신선에 비유한 김정희는 완당전집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구경거리입니다. 이곳에는 촌리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의 문 동쪽 서쪽이 모두 그러하건만 굴 속에 처박힌 초췌한 이 몸이야 어떻게 이것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눈을 감아 버리면 그만이거니와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떻게 해야 눈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우마에게 먹이고 또 짓밟으며 또한 그것이 보리밭에 많이 났기 때문에 촌리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모두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호미로 파내도 다시 나곤 하기 때문에 또는 이것을 원수 보듯 하니 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추사와 차 그리고 초의선사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 중 하나는 차를 재배해 달여 마시는 것이었다. 김정희에게는 500여 개의 호가 있었다는데, 그 중 승설, 고다 노인, 다문 등 차와 관련된 호가 많다. 다음은 조선 제일의 차 마니아 추사 김정희가 그의 벗인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이다. 

“…차 시절은 아직 이른 게요? 아니면 따기 시작하였소? 몹시 기다리고 있다오. 햇차는 몇 근이나 따시었소? 남겨두었다가 장차 내게 주시겠소? 우전차의 잎은 몇 근이나 따시었소? 언제 보내주어 차에 대한 나의 욕심을 진정시켜 주시려오?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오. …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뭉동이 30방을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료….”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던 추사는 가장 절친한 벗에게 생떼 쓰는 것처럼 보이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차를 애타게 기다렸던 모양이다. 

추사는 세 살 때 붓을 잡기 시작해 6살에는 입춘첩을 써 붙일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이를 본 박제가가 어린 추사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 역시 추사를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 칭송하며 스승을 자처할 정도였다. 그의 나의 24세인 1809년 아버지 김노경과 중국 연경으로 가 갖가지 종류의 중국 명차들을 맛본 후 추사는 차를 즐기게 되었고, 차에 대한 대단한 상식을 갖게 되었다. 

18세기만 해도 다도란 불가에서 스님들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우리나라 다도 문화 3대 거성으로는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를 든다. 

특히 정약용은 조선 초기에 거의 사라졌던 차 문화를 부흥시킨 우리 차의 중흥조로 통한다. 초의선사(1786-1866)는 다산의 제자이다. 초의선사는 중국 차밖에 몰랐던 양반들에게 큰 충격을 줄 정도로 조선 차를 발전시켰다. 초의의 차를 맛본 추사는 초의선사의 차 예찬론자가 돼 이를 널리 알렸다. 그러던 중 추사가 윤상도 옥사에 관련돼 제주로 유배 오면서 그의 다도 생활에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추사가 유배될 당시인 1840년대에는 제주에서는 차를 구경할 수 없었다. 추사가 차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벗인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것뿐이었다. 1843년 초의선사가 유배지인 제주까지 추사를 찾아올 정도로 둘 사이의 우정은 각별했던 모양이다.

차를 좋아하는 추사를 위해 초의선사를 비롯한 육지의 여러 지인이 차를 보내왔다. 하지만 제주까지 오는 동안 상하기 일쑤였다. 결국 추사는 차를 직접 만들어 마셔야 했다. 추사가 만든 차의 이름을 빈랑잎 황차라 전한다. 

황차는 소화기능을 좋게 하고 위를 보호하며 장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에 위장병과 풍토병이 있던 추사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빈랑잎은 열대 야자수다. 차 전문가들은 야자수와 흡사한 빈랑잎은 처음에는 딱딱하나, 발효과정을 거치며 진한 찻물이 우러나고 향과 맛이 은은하고 달콤하면서 맑고 깨끗하다고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