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줄’을 지키던 돌담…이제는 제주의 美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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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제주올레 밭담길
개간 시 애물단지였던 ‘돌’, 내 땅임을 알리는 울타리로 활용
거센 바람으로 인한 토양 유실·농작물 쓰러짐 등 막아줘
제주밭담 사진공모전 입선작 고순환 작가의 ‘우도에서’.
제주밭담 사진공모전 입선작 고순환 작가의 ‘우도에서’.

올레 20코스에 속한 월정리 카페거리에 차를 몰고 들른 외지인 여행자들은 아까운 걸 놓치고 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만 더 움직이면 제주 문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밭담’에 좀 더 친숙해질 수 있는데 말이다. 월정리 해안에서 서쪽으로 2㎞ 지점에 있는 ‘제주밭담 테마공원’이 그곳이다. 김녕리를 벗어나 월정리로 막 들어선 올레 20코스 노선상에 위치하기에 올레꾼들이야 당연히 거쳐 간다. 

이곳은 밭담이 2015년에 국가농업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조성된 7600㎦ 면적의 아담한 미니소공원이다. 제주 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각양각색의 돌담들을 유형별로 전시해 놓았다. 밭과 밭 사이 소유 경계를 구분 짓는 밭담은 물론 자그마한 돌들로 맹지에 길 용도로 촘촘하게 쌓아 두른 ‘잣담’, 혹은 무덤 훼손을 막기 위해 주위에 돌을 쌓은 ‘산담’ 등을 실물 규모로 만날 수 있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물질을 하고 나와서 불을 쬐며 언 몸을 녹이고 소통의 장소로 쓰였던 ‘불턱’이나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겸했던 ‘통시’를 둘러볼 때는 옛 제주인들의 일상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제주 문화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들른다면 유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이곳에는 테마공원을 출발해 아담한 정자인 진빌레정을 지나 한 바퀴 돌아오는 ‘진빌레 밭담길’도 조성돼 있다. 2.5㎞ 거리에 40분 정도 소요되는 편안한 산책길이다. 반환점인 진빌레정은 밭과 밭담, 풍력발전기들이 멀리 푸른 바다와 어울려 멋진 풍광을 선사하는 전망대 구실도 해준다. 진빌레의 ‘진’은 ‘길다’의 형용사, ‘빌레’는 ‘넓고 평평한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땅’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화산 폭발로 한라산이 솟아나던 시절의 섬 표면은 용암이 굳어진 화산암과 화산재로 온통 뒤덮였다. 이후 수백만 년 세월이 흐르며 지표면 화산암들은 풍화작용이란 자연의 힘에 의해 크고 작은 바위들로 쪼개졌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섬에 나타난 인간들이 꾸준히 땅 위의 돌덩이들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뭔가 구조물을 짓거나 먹거리를 심거나 하면서 오늘날 제주 섬 모습이 만들어졌다. 월정리의 진빌레는 이를테면 수백만 년 세월을 그 자리에 버텨오면서 자연의 힘도, 인간의 힘도 어쩌지 못한 거대한 바위덩이인 것이다. 

제주밭담 사진공모전, 입선작 김현정 작가의 ‘겨울풍경’
제주밭담 사진공모전, 입선작 김현정 작가의 ‘겨울풍경’

돌, 바람, 여자가 많다 해서 삼다(三多)의 섬이다. 세 가지가 많은 이유도 자명하고 셋 사이엔 어떤 연결고리도 있어 보인다. 돌이 많은 이유야 위에서 보듯 월정리 진빌레 밭담길이 설명해준다. 태풍의 길목에 자리잡으면서 망망대해 외딴 섬이다 보니, 바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건 제주사람들의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돌덩이 천지다 보니 농사지을 밭을 개간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다. 애써 일군 땅에 뭔가를 심어도 거센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척박한 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가서 모자란 먹거리를 구해와야만 했다. 노 젓고 바다로 나가는 건 남자의 몫, 조그만 나룻배가 제주 바다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긴 쉽지가 않았을 터라, 무수한 남자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목호의 난과 4·3사건, 섬에서 일어난 두 번의 대량학살도 남녀 성비(性比)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오랜 옛날 제주 섬을 뒤덮었던 화산암은 이렇게 훗날 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인간들에게 커다란 난관이 됐다. 땅을 덮고 있는 돌덩이들을 치워야만 그 자리에 뭔가 먹거리를 심든지 비바람을 막아줄 움막이라도 지을 수 있었다. 밭을 개간하는 일은 곧 돌과의 싸움이었다. 이렇게 걷어낸 돌덩이들은 처음엔 그저 한쪽 구석에 몰아서 내팽개쳐졌고, 이 구석은 오늘날의 쓰레기하치장처럼 불용 면적이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쓸모없는 돌덩이들을 쓸모 있게 활용하는 선구자가 나타났다. 열심히 개간한 밭 주위에 이들 돌덩이들을 옮겨다가 울타리를 쌓아본 것이다. 한 줄의 높은 돌담을 길게 쌓다 보니 원래 돌더미(머들)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던 자리도 비워졌다. 그만큼 땅의 가용 면적도 늘어났다. 더 기뻤던 건 울타리 안쪽은 명확한 내 땅임을 남들 모두에게 알리고 증명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본 이웃들이 하나 둘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내 구역을 만들기 위해 돌과의 싸움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섬에는 경작 가능한 밭 면적이 점차 늘어났고 그에 비례해 밭담의 길이도 함께 늘어났다. 땅의 소유권을 분명히 해주는 것 외에도 밭담의 효과는 더 있었다. 제주의 거센 바람은 토양의 수분을 쉽게 증발시켜 버리거나, 농작물을 쓰러뜨리며 한해 농사를 망치는 요인이 되었지만 길게 둘러친 밭담은 농작물을 강한 바람과 토양 유실 등으로부터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소와 말이 함부로 돌아다니며 농작물을 망치는 걸 막아주는 등 밭담의 효과는 참으로 컸다. 

이와 같은 다양한 가치를 인정받아 제주밭담은 2014년 FAO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됐다.

이곳 올레 20코스 외에도 제주에는 성산, 한림, 애월에 6개의 밭담길이 더 조성돼 있다. 성산에 난미 밭담길, 어멍아방 밭담길, 한림에 수류촌 밭담길, 영등할망 밭담길, 애원에 물메 밭담길, 공세미 밭담길 같은 정겹고 토속적인 이름도 갖고 있다. 제주도 어디서나 흔하고 흔한 게 밭담이지만 상태나 주변 경관 등을 고려해 특별히 여덟 군데 밭담길을 지정한 것이다. 올레길에서는 3-A코스에서 난미 밭담길, 16코스에서 물메 밭담길을 만날 수 있고, 나머지 두 개 밭담길은 올레 노선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누군가가 제주 밭담의 전체 거리를 재 보니 2만2000㎞가 조금 넘었다고 한다. 지구 한 바퀴의 절반 거리이며, 만리장성(6400㎞) 보다 3~4배 길고, 제주도 해안둘레(270㎞)와 비교하면 100배가 조금 안 된다. 제주에서의 밭담과 돌담의 역사와 그 의미를 알고 걸으면 제주에 대한 외지 여행자들의 시야가 조금은 더 넓고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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