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제주의 해상 관문에서 독립만세 울려 퍼졌다
(10)제주의 해상 관문에서 독립만세 울려 퍼졌다
  • 좌동철 기자
  • 승인 202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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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항일운동의 성지 조천읍


조선시대 부임한 관리와 유배인 조천포구로 입도
1911년 조천만세운동 도내 전역에 독립운동 전파
유배 온 이승훈 선생, 민족의식 고취 교육활동 앞장
임금을 사모하는 의미가 담긴 조천포구에 있는 연북정(戀北亭) 전경.
임금을 사모하는 의미가 담긴 조천포구에 있는 연북정(戀北亭) 전경.

진나라의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찾아 제주에 왔다가 떠날 때 조천포구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포구의 큰 바위에 조천석(朝天石)이라고 새겨 놓았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조천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하늘’이란 의미와 함께 뭍으로 나가려는 제주도민들이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하늘을 살핀다는 뜻으로 지명이 유래됐다.

제주에 부임하는 관리와 유배인들은 주로 조천포구와 화북포구를 이용해 제주 땅을 밟았다. 조천포구는 제주의 대표적인 해상 관문이었다.

조천진성은 제주를 지키던 9개의 진(鎭) 중 하나다. 1599년 성윤문 제주목사는 조천진성의 망루를 보수해 ‘연북정(戀北亭)’으로 명명했다.

연북(戀北)은 북쪽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임금에 대한 사모와 충정을 보내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배인들은 제주이 관문인 연북정에서 임금이 내릴 사면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연북정은 1971년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다.

제주목사와 판관의 치적을 기리는 조천 비석거리.
제주목사와 판관의 치적을 기리는 조천 비석거리.

비석거리는 조천포구 입구에 있다. 조선시대 파견된 지방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부임 또는 이임을 하면서 이들에 대한 치적과 석별의 정을 기리며 비석을 세웠다.

비석마다 ‘불망비(不忘碑)’ 또는 ‘선정비(善政碑)’라고 새겨진 이유다. 제주목사를 지낸 채동건·백희수·김수익·이의식·이원달과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 등 모두 7기의 비석이 남아있다.

사상(使相·목사)과 통판(通判·판관)을 기리는 비석 뒷면은 마멸이 심해 건립 연대는 알아볼 수 없지만 제주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됐다.

조천지역은 제주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1919년 제주에서의 3·1운동은 조천지역에서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조천만세운동은 서울 휘문고보 학생이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됐다.

그해 3월 21일 아침 조천리 미밋동산(만세동산)에 김시범·김시은·김장환·고재륜 등 14인의 동지와 학생, 주민 등 150여 명이 모였다.

김필원의 혈서로 ‘대한 독립만세’를 쓰고 만세를 외치며 미밋동산을 향해 행진하는 것을 본 주민 500여 명이 동참했다.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성내까지 행진을 계획했다. 신촌리에서 일경과 충돌하면서 3명이 부상을 당했다. 김시범과 김시은 등 13인은 체포됐다.

4차례나 전개된 만세운동은 함덕·신촌·신흥 등 인근 마을뿐만 아니라 서귀포로 확산됐다. 제주의 3·1운동은 제주도민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됐다.

조천리 미밋동산(만세동산) 정상에 세워진 3·1독립운동 기념탑.
조천리 미밋동산(만세동산) 정상에 세워진 3·1독립운동 기념탑.

조천 비석거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거사한 14인의 독립지사 생가 터에는 표지석이 설치됐다.

조선과 한말을 통틀어 500년 동안 제주에 온 260여 명의 유배인 중 마지막이자, 일제에 의해 최초로 온 유배인은 남강 이승훈 선생(1864~1930)이다.

그는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돼 4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의 유배생활이었지만 그는 도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에 앞장섰다.

그는 조천에서 제주성내에 있는 성내교회에 나가며 교회 부설 영흥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승훈은 도민들에게 기독교 사상과 신교육을 전파했다. 1910~1914년 동안 전국의 사립학교가 1973개교에서 1242개교로 731개교(37%)나 줄어든 반면, 제주지역은 11개교에서 24개교로 2배 이상 늘었다.

이는 이승훈의 활발한 교육활동 때문이었다.

유배를 마친 그는 상경해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이승훈 선생은 옛 조천오일장이 들어섰던 조천읍 조천리 2473-2번지의 49㎡(15평) 초가에서 살았다. 이 집은 원래 제주군수와 정의군수를 지낸 김희주의 하인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1990년 남강문화재단과 제주도사연구회가 동판을 제작해 이승훈의 유배처를 알렸으나 세월이 흘러 초가는 기와집으로 개조되면서 옛 모습을 잃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유골을 해부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습에 이용하도록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했다. <1부 끝>

남강 이승훈 선생 적거터.
남강 이승훈 선생 적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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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 2021-03-25 18:48:57
조천석에 대한 기사가 잘못되었군요. 고구려 동명성왕이 기린마를 타고 조천석에서 승천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단순히 '아침하늘'을 보고 조천석이라 새긴 것이 아니고, '신계에 들어서는 입구'라는 뜻에서 고래로부터 쓰던 말입니다. 옛문헌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