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농어촌 진흥 통한 자립 도모…열혈 청년동맹 단원
(179) 농어촌 진흥 통한 자립 도모…열혈 청년동맹 단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부병훈, 친일 배척·계몽 운동 나서…농민조합 창립준비委 조직
 부상규, 성제의원 개업의…토지 88평 희사해 세화교회 설립도
 부생종, 독립운동 조직 향동회 등 결성…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부시웅, 영조 때 다경포진 만호…힘이 세서 ‘부대각’이라 불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2, 제주도)’에 실린 제주공립보통학교 사진. 제주공립보통학교는 제주 청년동맹 화북지부와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에서 항일 운동을 펼쳤던 부병훈의 모교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2, 제주도)’에 실린 제주공립보통학교 사진. 제주공립보통학교는 제주 청년동맹 화북지부와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에서 항일 운동을 펼쳤던 부병훈의 모교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부병훈夫秉勳:1907(융희1)~1971, 함덕 독서회와 제주 청년동맹 화북지부 및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 항일 활동, 자는 맹현(孟鉉), 본관은 제주.

1945년 광복이 돼 제주읍 인민위원회 간부, 또 남로당 화북 책임자가 됐으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년 3월 20일 일본 오사카(大阪) 포시시(布施市) 북사초(北蛇草)에서 사망했으며 후손들은 일본에 살고 있다. 항일 운동을 확산하던 중 1934년 8월에 붙잡혀 1937년 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부응문(夫應文)의 3남 중 장남으로 제주시 화북동 ‘별도’에서 태어났다. 1924년 3월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농업학교 및 서울의 사립 중동학교 1학년에 재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도쿄, 오사카 등지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사진 학원(동경 소재)에서 수학하고 1930년 8월 수료 후 귀향했다. 

사진업을 하면서 제주청년동맹 화북지부에 가맹, 문화부 위원으로 취임했다. 동 동맹 간부 강창보(姜昌輔)와 장종식(張鍾植)의 교양을 받아 급진적인 항일 청년들과 교유했다. 

1931년 2월 12일 그는 화북사립보통학교 6학년 소년 단원 신승근(愼承根)의 장례식에 참여, 동교의 학생 앞에서 고별사를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하면서 적기가를 합창하게 했다. 

또 동년 3월 5일에 그는 강윤석과 함께 “교내 경찰권의 침입을 철저히 저지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작성해 마을 안 요소에 부착하기도 했다. 일부 교원이 일경에 밀고하는 등 친일적 행위를 일삼자, 교원 배척 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1931년 3월 체포돼 1931년 10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에 5년간 집행유예를 언도받았다.

1932년 12월 이후 부병훈은 화북자치회 창립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합법적인 계몽에 나섰다. 화북자치회는 자력갱생(自力更生)을 기초로 하여 농·어촌의 진흥을 목표로 내세움으로써, 1930년대 일제의 농촌 진흥 정책에 부합했던 단체였다. 

부병훈은 규약제정위원으로 선임돼 자치회 조직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나갔다. 1933년 1월 5일 화북자치회의 창립 대회에서 서기로 취임해 수회에 걸친 정기 대회와 간부 회의를 통해 합법적인 운동을 펼쳤다. 

당시 화북자치회에서 벌였던 사업은 첫째,단발 및 염색 옷 장려, 둘째 부녀자의 야학 개시, 셋째 미신 타파, 넷째 밀주 금지 및 적발, 다섯째 이민회의소 건축 기금 모금, 여섯째 화북사립보통학교장의 부정 폭로 등이었다. 

부병훈은 김경봉, 김두경, 김일준 등과 접촉, 1933년 1월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부병훈은 제주읍 일원을, 김경봉은 한림면·애월면을, 김일준은 조천면·구좌면을 담당했다.

▲부상규夫尙奎:1887(고종24)~1933(일제강점기), 의생(醫生), 세화리에 성제(誠濟)의원 개업, 한시 작가, 초기 기독교인, 호는 성제(誠濟), 본관은 제주.

구좌읍 한동리(궷-골)에서 태어나 세화리에서 오래 살았다. 일찍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1907년(융희1) 후쿠오카(福岡)의학강습소에서 1년 동안 현대 의학을 배웠다. 또 한문에도 조예가 깊어서 제주향교에서 주최하는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혀 실력을 과시한 바 있다.

기독교에 관심이 깊어 목포에 주재하던 의료 선교사의 복음을 받고 또 부산진(釜山鎭) 왕길지(王吉志)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으며 또 제주의 이기풍(李基豊)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본도 동부 지역의 초기 신자가 됐다. 1919년 임정찬(林貞燦) 목사의 지도로 한동리 그의 집에서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1920년 서귀포로 들어가 일본인이 운영하던 소천의원(小淺醫院)에서 보조자로서 선진 의술 습득에 한층 힘썼다. 

1922년 예배소를 세화리로 이전, 1923년 의생 시험에 합격해 같은 해 9월 세화리에 성제(誠濟)의원을 개업하니 이 고장에 현대 의술을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1924년 그의 소유 토지 88평을 희사하니 세화교회가 신축됐다. 

처음 부산 용당동에서 양의를 개설, 10여 년 동안 인술을 펼쳤으며 세화교회를 창건한 그는 1928년 초대 장로가 됐다. 장로교의 교세 확장에 뜻을 쏟으면서 의술로써 대민 봉사에도 힘을 보탰다. 이에 세화공회당 앞뜰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공로비가 세워졌다. 

1932년 12월 29일, 그는 향년 45세 나이로 종명했다. 이듬해 1월 3일 장례가 치러졌고 많은 사람들이 애도했다. 당시의 일인 도사(島司) ‘다나카-한지’도 조문했다. 부인 김상년씨와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부생종夫生鍾:1909(융희3)~1936(일제강점기), 함덕독서회와 청년동맹 및 함덕리 추도비 건립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의 항일 활동,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자는 화종(華鍾), 호는 설파(雪波), 본관은 제주.

아버지 부만천(夫萬千)과 어머니 김완희(金完熙)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조천읍 함덕리 ‘서산’에서 태어났다. 

1928년 3월 조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오사카 등지에서 노동을 하면서 민족 차별이 심한 것에 민족주의적인 저항 의식이 생겼다.

귀향 후 해산물 장사를 하면서 제주 청년동맹 함덕지부에 가입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동지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 내용에 독립 사상이 들어있다 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1931년 12월 8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았다. 

그는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향동회(鄕同會)와 민풍(民風)진흥회를 조직했으며 또 동년 4월 혁명적 함덕농민조합협의회를 결성해 책임자는 김일준(金日準)으로 하고, 김원근(金元根)은 농민부를, 그는 조직선전부를 맡아 활동을 강화했다. 

이들은 1933년 2월 하순에 함께 모여서 농민 대중을 본위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혁명적 농민조합의 건설에 나서기로 하고, 그 하부 조직으로서, ‘신좌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34년 8월에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 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돼 목포로 압송, 1936년 6월 초순 공판에 회부됐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급성 대장염으로 동년 6월 29일 오전 8시 50분 목포형무소에서 옥사, 동 7월 1일 부친 부만천(夫萬千)은 피눈물을 머금고 동 형무소에 찾아가 장한 아들의 유해를 찾아 대서환(大西丸) 편으로 운구 귀환해 장사를 치렀다.

▲부시웅夫時雄:1703(숙종29)~?, 힘이 매우 세서 부대각(夫大角)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영조 때의 무신, 전라도 영광군의 다경포진(多慶浦鎭) 만호(萬戶), 본관은 제주.

구좌읍 평대에서 아버지 부명호(夫命豪)와 어머니 김해 김씨의 큰아들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했다.

‘탐라인물고’에는 전라도 영암군의 이진진(梨津鎭) 만호를 역임한 것으로 기록됐으나 살피건대 다경포진 만호를 지낸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매우 힘이 세서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부대각이 서울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제주목사는 그가 제주에 오면 목사로서 골치가 아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사전에 일을 꾸며 해중(海中)에서 배가 가라앉도록 해 이때 그는 해중고혼(海中孤魂)이 됐다고 전해진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