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세에 과거 급제…사후 호조참판 벼슬
81세에 과거 급제…사후 호조참판 벼슬
  • 제주일보
  • 승인 20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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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호조참판 김명헌·과거제도
김명헌, 정조 임금 배려로 아홉 번 만에…교지 수령 전 숨져
조선시대 과거 응시 위해 제주 유생들 험난한 바다 건너야해
인조 첫 해 지방 민심 수습 위해 제주서 치러지는 시재 열려
한양에서 치를 전시 전에 김명헌이 사망해 임금이 경국대전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공을 호조참판에 증직했다는 교지.
한양에서 치를 전시 전에 김명헌이 사망해 임금이 경국대전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공을 호조참판에 증직했다는 교지.
1794년 심낙수 어사가 내도해 열린 과거 策에서 2위를 한 김명헌의 시권.
1794년 심낙수 어사가 내도해 열린 과거 策에서 2위를 한 김명헌의 시권.

▲변경붕 대정현감이 기록한 갑인년 대흉년

‘(1794년)8월 27일과 28일 2일 동안 휘저은 강풍이 추수를 앞둔 들녘을 강타하니, 큰 기근이 이어졌다. 바람이 어찌나 드센지 바다 짠물이 하늘을 덮었고 큰 나무들마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집들은 무너지고, 도로는 날아든 돌덩이에 막혀 오갈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엄청난 재앙에 넋을 잃고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제주목사는 급히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구휼하려 했으나 바닷길이 험난하여 10월부터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겼다. 거리에 시체들이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꺼려하지도 않았다. 이듬해 1월 구휼양곡을 실은 배 30척이 화북포와 조천포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뒤따라 오던 다섯 척의 배는 포구가 좁고 여울이 심해 머뭇거리는 사이 갑자기 바람이 일어 침몰되었다. 배에 실은 수천 포의 쌀이 바다에 빠져버렸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위의 글은 갑인년 대기근에 대한 변경붕의 처절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대기근 시 굶주린 사람 수가 1794년 겨울 기민은 6만2698명이고, 1795년 겨울 기민은 4만3735명이어서, 감축된 자가 1만8963명에 이른다고 전한다. 갑인년 대기근 시의 기아자들에 대해 변경붕은 다음과 같이 특이하게 적고 있다.

‘쇠고기를 먹은 사람은 배고픔을 이겨냈고, 말고기를 먹은 자는 더욱 배고파했다.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은 자는 배를 채웠지만, 해산물을 먹은 자는 배고파했다. 곡물을 적게 먹으면서 배고픔을 견딘 사람은 살았지만, 채소를 많이 먹으며 배를 채운 사람은 죽었다.’

호조참판 김명헌이 생전에 사용했던 붓통.
호조참판 김명헌이 생전에 사용했던 붓통.

▲81세에 호조참판에 오른 김명헌

행년구구 낙제삼삼(行年九九 落第三三)으로도 알려진 김명헌은 위에 소개한 대정현감 변경붕의 스승이다. 1794년 심낙수 어사가 내도해 열린 과거에서 제자 변경붕은 論에 급제했으나, 스승인 김명헌은 策에서 2등에 머물렀다. 81세 나이로 과거에 응시했던 김명헌이 지은 책 가운데 ‘行年九九에 落第三三(지금 나이는 81세, 낙제는 아홉 번 했구나)’라는 구절을 가상히 여긴 정조임금이 특별히 합격시켰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한다. 고령의 김명헌이 교지를 받으러 한양에 갈 수 없게 되자 임금이 제주목으로 교지를 내렸으나, 이듬해 2월 교지를 받기 전에 김명헌 공은 숨을 거두었다. 교지를 가져온 관원이 교지를 고인의 관 위에 올리는 순간, 관이 부르르 떨면서 교지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전한다. 

필자는 김명헌 공의 후예(김광철·김창희)들과 회수동 소재 종가를 방문해 공의 교지들과 시권(試券: 과거 답안지) 등의 유품을 살펴볼 행운을 가졌다. 또한, 종손 김원범님의 안내로 중문동 동쪽 동산에 있는 공의 공덕비와 하원동 탐라왕자묘 근처에 위치한 묘역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과거에 응시한 것을 계기로 하여 제주지역에서의 과거제도 변화를 다음과 같이 엿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과거에는 문과와 무과 그리고 잡과가 있었다. 제주 유생들은 전라도 관찰사 주재로 3년마다 치러지는 식년 문과에서 초시(향시)에 응시하기 위해 험난한 바다를 건너야 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제주의 세 고을은 바다 멀리 밖에 있어, 수로가 험악하기 때문에 교수와 훈도가 입도하는 것을 싫어하고 꺼리니, 함흥지역의 예에 따라 품계를 더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향교의 관원인 교수와 훈도가 입도를 꺼려함은 곧 제주 유학 교육의 낙후함으로 이어진다. 이에 숙종 때는 전라도의 문과 초시 정원 중 일정 수를 제주에 할당하는 규칙이 정해지기도 했다. 이에 앞서 제주에서는 향시인 승보시(陞補試)가 있었다. 승보시는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초시의 시작으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 1638년(인조16) 다시 개시됐다. 1703년 편찬된 탐라순력도 승보시사(陞補試士)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승보시는 출사의 당락을 결정하는 시험이 아니었을뿐더러, 국방의 요충지였던 제주지역에 파견된 목사와 판관이 모두 무관 출신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편이었다. 초시(향시)인 승보시 급제자는 복시인 회시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야 하나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다음은 표해록의 저자인 장한철의 향시에 대한 글이다. 

‘내가 이전에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한양으로 시험을 치르러 갈 수 없었던 것은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고 집안에 한두 섬의 쌀도 없어서 짐을 싸서 멀리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제주에서의 소과 급제자의 기록인 사마방목(司馬榜目)과 사마선생안(司馬先生案)에는 29명만이 들어 있다. 이들 중 19세기 이전의 급제자는 6명에 불과하다. 그러던 중 17세기에 들어서 제주지역 과거 설행에 변화가 생기는데, 별견어사(別遣御使)의 파견에 의한 시재설행(試才設行)과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권이 그것이다. 

▲제주시재(濟州試才)

제주에서는 인조 집권 첫 해인 1623년에 제주시재가 시작됐다. 제주시재는 식년문과의 회시(會試=복시覆試: 초시에 합격한 이가 보는 두 번째 시험)에 해당하며, 국방의 요지 또는 특수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행해지는 특별시험이었다. 제주·강화·화성 등지에서 실시됐던 시재에서 선비가 시·부·책 중의 하나를 선택해 작성한 답안지인 시권은 봉한 채로 한양으로 옮겨지면, 대제학이 과차했다. 과차(科次)란 과거에 급제한 이의 성적 등급을 정하는 것이고, 이에 따른 2~3명의 합격자에게는 전시에 응시할 특전이 주어졌다. 전시(殿試)란 문과 복시에서 선발된 33명과 무과 복시에서 선발된 28명이 궐내에서 순위를 정하기 위해 왕의 친림 하에 보던 과거이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용방록. 1414년부터 1863년까지 문과에 합격한 56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용방록. 1414년부터 1863년까지 문과에 합격한 56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1623년부터 1888년까지 제주시재에 응시해 급제한 사람은 모두 55명이다. 이를 기록한 서책이 1877년 전후 간행된 국조방목(國朝榜目)과 용방록(龍榜錄)이다. 내제(內題)가 진신선생안(縉紳先生案)이라 적힌 용방은 문과에 급제한 것을 이르는 말이며, 용방록은 문과 급제자를 기록한 문서이다. 1991년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돼 제주향교에 소장돼 있다. 

용방록에는 1414년 급제한 고득종부터 1863 급제한 한석윤까지 총 56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내제(內題)가 사마선생안이라 적힌 연방록(蓮榜錄)은, 소과 사마시인 생원과·진사과의 향시(1차)와 회시(2차)에 합격한 제주선인들의 이름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인명록이다. 

제주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돼 제주향교에 소장되고 있는 연방록에는 명종 시에 급제한 김양필로부터 1891년 급제한 전군형까지 24인이 기록돼 있다. 

급제선생안은 무과에 급제한 제주선인들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이다. 제주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돼 삼성사재단에 소장되고 있는 급제선생안에는 1558년 급제한 양연으로부터 1815년 좌인호까지 총 338명의 이름을 연대순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누락된 급제자도 더러 있어 지속적으로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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