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의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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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논설위원

지난 4월 3일 오전 10시 일본 오사카 덴노지(天王寺)에 위치하는 화기산통국사(和気山統国寺)에서 제주4·3 희생자의 넋을 달래는 스님들의 불공이 시작되었다.

제주 현지의 73주년 4·3 추념식이 시작되는 1시간 전이었다. 통국사에는 4·3 70주년에 즈음해서 재일제주인을 비롯한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제주 4·3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통국사에서는 위령비가 건립된 이후 매해 4월 3일에 법회를 지내고 있다.

올해는 민단 오사카 본부와 총련 오사카 본부의 일본에서 남과 북을 대표하는 두 민족단체가 조화를 올려 주었다. 일본에서 4·3 추도행사는 남북화해를 위한 의지를 품게 되는 셈이다.

오사카 4·3 위령제 실행위원회의 핵심 멤버인 양우자는 “코로나 감염 때문에 제주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 하지만 통국사에 가면 위령비가 있어서 추도할 수 있다. 경내 화분에 심어진 동백나무는 참석자의 마음과 제주를 이어줄 것 같았다”라고 법회에서 간직하게 된 심정을 토로했다.

오사카의 4월은 과거사와 관련되는 애도의 시절이기도 하다. 제주 4·3만 해도 통국사에서의 법회와 더불어 4월 하순에는 제주에서 4·3 유족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를 모시고 치러질 위령제가 있다(올해는 제주 분들은 영상 메시지로 대신한다).

게다가 4·3 말고도 4·19나 4·24도 연중행사로서 관련 단체들이 제각기 기념행사를 치른다. 특히 4·24, 즉 <한신(阪神) 교육 투쟁>은 바로 이곳 오사카가 주된 현장이 된 사건으로서 재일동포 역사에 새겨져 있다.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단행된 1948년 4월, 일본에서는 일본정부를 앞세운 점령군(GHQ)과 재일 동포 간의 민족교육의 폐쇄조치를 둘러싼 공방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민족교육을 지키려는 동포들의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戶), 즉 한신(阪神)지역이었다. 4월 24일, 고베에는 <비상사태>가 선언되어 16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오사카에서는 26일, 3만 명이 결집한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고, 당시 16살이던 김태일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선포된 <비상사태>는 7년에 걸친 일본 점령 통치에서 GHQ가 유일하게 발동한 조치였다. 그만큼 GHQ는 이 사태를 엄중하게 보고 있었다. 그 당시 동북아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미국이 가장 중요시하고 있었던 것은 5·10 단선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일이었다. GHQ는 재일동포들의 항의투쟁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반대 운동과 연결될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4·3 직후에 기록된 GHQ의 어떤 문서(10 April 1948, MacArthur Memorial)는 “재일 한국인 가운데 특히 오사카지구의 이단분자들은 남한에서의 대규모 폭동과 연대하면서 점령군을 곤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고, 폭동을 일으키고, 다른 민중운동을 지원할지도 모른다”고 위기감을 드러내고 있다.

4·3 70주년 이래 제주4·3이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점이 강조되어 4·3에 관한 국민적 이해를 촉구하는 데 결실을 본 것 같다. 하지만 <한신교육투쟁>의 사례는 제주4·3이 그러한 국민국가의 테두리 자체도 벗어난 다양한 사건·사태들의 연관 속에서 일어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당시 재일동포 사회와의 관련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4·3특별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4·3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오늘 재차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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