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만장굴 첫 개척자…제주 자연 가치 알리는 데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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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종인, 선정 베푼 대정현감
 부종의, 고려 말에 진위교위
 부종휴, 교육자·식물학자 등
 부진룡, 순조 때 살았던 시인
 부춘화, 해녀 항일 운동 주도
만장굴을 탐방하는 사람들의 모습. 부종휴는 1946~1947년 폐허처럼 방치돼 있던 만장굴을 발견하고 이름 지어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만장굴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대표적 동굴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돼 있다.
만장굴을 탐방하는 사람들의 모습. 부종휴는 1946~1947년 폐허처럼 방치돼 있던 만장굴을 발견하고 이름 지어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만장굴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대표적 동굴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돼 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부종인夫宗仁:1767(영조43)~1822(순조22), 문신, 대정현감, 자는 자겸(子謙)이며 본관은 제주, 도훈(道勛)의 아들이다. 

정의현(旌義縣), 즉 서귀읍 토평리(돚-드르)에서 태어났다.

1795년(정조19)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합격, 성균사성(成均司成)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1794년 제주위유안핵순무 시재어사 심낙수(沈樂洙)가 입도해 과장을 개설해 문과에 7명, 무과에 10명을 시취할 때에 그는 책(策) 분야에서 발군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경상도 자인현(慈仁縣)의 현감을 거치고 1794년 사성(司成)에 올랐다. 1799년(정조23) 1월, 홍삼필(洪三弼)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도임하고 1801년(순조1) 8월에 선정을 베풀고, 교육 진흥에 힘을 쏟고 떠났다. 

한편, 대정현감으로 재임중 대정서당(大靜書堂)을 동계(桐溪) 정온적려유허지(鄭蘊謫廬遺墟址) 터전 안으로 이설해 열락재(悅樂齋)라고 이름 붙였다. 

당시 제주목사 정관휘(鄭觀輝)가 지은 ‘열락재기(悅樂齋記)’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부종인은 치정이 청렴결백하고 학문을 일으켜 선비를 양성했다는 데서 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그에 대한 흥학비(興學碑)가 세워졌다.

▲부종의夫宗義:생몰년 미상, 고려 말-조선 태조 초 탐라국의 진위교위, 문사, 본관은 제주이며 호는 답동자(踏東子)이다. 

그의 조상으로는 1049(문종3)년에 77인(人)을 이끌고 고려조에 입조(入朝)한 탐라국 진위교위(振威校尉) 부을잉(夫乙仍)과 고려 제25대 충렬왕 때 원나라 탐라총관부 영사(令史) 행서부사(行署府事)였던 부정재(夫貞才)가 있다. 특히 부종의(夫宗義)의 ‘고려대전 봉안문’은 유명하다. 한학자 소농(素農) 오문복(吳文福)의 번역문이 전한다.

동굴 탐험가, 교육자, 식물학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부종휴의 생전 모습.
동굴 탐험가, 교육자, 식물학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부종휴의 생전 모습.

▲부종휴夫宗休:1926(일제강점기)~1980, 동굴 탐험가, 교육자, 식물학자, 음악가, 사진작가, 산악인 등, 한라산우회(漢拏山友會) 회장, 1973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 제주부씨 대렴공파(장파), 원적은 구좌면 세화리.

의사 부상규(夫尙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녕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6년 만장굴을 발견, 실측해 경남일보에 발표했다. 만장굴(萬丈窟)이란 이름도 그가 명명(命名)했다. 

1947년 제주농업중(6년제)의 음악 및 생물교사로 재직, 이어 신성여고, 제주사범 교사, 1953년부터 부산대학 약대 조교, 서울대학 생약연구소 연구원, 69년 ‘빌레못-동굴’을 실측한 바 있다.

천연기념물 제98호인 만장굴은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대표적인 동굴이다. 약 250만 년 전 제주도 화산 폭발 시 한라산 분화구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바닷가 쪽으로 흐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46~1947년에 이를 찾아낸 사람이 부종휴이다. 지금 만장굴 자리는 사실상 폐허처럼 방치된 곳이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부활절날 제1입구를 확인한 부종휴 선생은 그 다음 주 초등학교 6학년 ‘꼬마-탐험대’를 조직해 2차 동굴 탐사에 나섰다. 조명 도구가 없어 횃불을 들고 열세 살 꼬마탐험대 30여 명을 데리고 조사했다. 굴 입구에서 1~2㎞ 들어가자 무너진 돌이 ‘돌-동산’을 이루고 있는데 위쪽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여 찾아낸 것이 우리가 들어가고 있는 제2입구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47년 부종휴는 다시 탐사해 동굴 끝을 찾아냈다. 부종휴 선생이 동굴 끝이 지상의 어디인가를 특정한 결과 그곳은 마을사람들이 ‘만쟁이-거멀’이라고 부르는 곳이었고 그래서 이 동굴은 만장(萬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부진룡夫璡龍:생몰년 미상, 문인, 순조(純祖) 연간에 조천읍 신촌리(숙군)에 살았던 시인(詩人).

※부진룡의 시=만이장挽李丈 이 노인 만사, 新村卽古村:신촌은 오래된 마을인데 /何以謂新村:어찌하여 새로 된 마을이라 하는가! /此村昔無人:이 마을에 옛날에는 인물이 없었는데 /令公生此村:어른께서 이 마을에 태어나셨네! /公生此村後:님이 이 마을에 태어난 후, /此村異他村:다른 마을과 유달리 달라졌습니다. /膝下多男子:슬하에 아들이 많아 /比屋自成村:집 주위에 마을을 이루니 /子致千金富:어른께선 천금의 부유함을 가졌고 /其富甲于村:그 부유함은 마을에서 제일 /孫應最携異:손자는 가장 재주가 뛰어나 /文翰破荒村:문장으로 거친 마을을 깨쳤고 /孫淑最雄勇:두 번째 손자는 가장 용감하여 /武威揚我村:무예로써 이 마을을 드날렸으므로 /德新俗又新:도덕이 새로워지고 풍속이 새로워 /新名李氏村:이씨의 새로운 마을이 되었습니다. /維新乃如許:오직 새로워짐이 이와 같으니 /宜乎謂新村 신촌이라 부름이 마땅합니다.

▲부춘화夫春花:1908(융희2)~1995, 해녀, 구좌 동부지구의 해녀 항일 운동, 2003년 건국포장 수훈, 하도리(별방) 청년회의 부녀 부장, 본관 제주. 

구좌읍 하도리(별방) 1411번지에서 부원돈(夫元敦)의 장녀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해녀 활동을 하고 1923년 하도 사립보통학교의 야학부에 들어가 기초 교육을 받으며 하도 부녀회 회장을 역임했다. 

1928년 제주 해녀조합 산하 구좌 해녀조합 대표로 선출돼 1931년 구좌 동부지구에서 일어난 해녀 항일 운동을 주도하면서 1932년 1월 7일 제주도사(島司) 다구치데이키(田口禎熹)에게 9개 항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해녀항쟁의 주동자 부춘화·김옥연·부덕량 등을 비롯한 많은 해녀들과 연결해 비밀 결사 ‘혁우동맹(革友同盟)의 제주도 야체이카사건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게 됐다.

1931년 5월 농민들은 당의 호소에 따라 각종 관제 조합에 반대해 농민들의 자주 조직으로서 농민회 설립에 착수했다. 또한 해녀들은 착취 기관인 ‘어업조합’에 반대해 자기들의 자주적인 결집체로서 해녀회를 만들고 단결했다. 농민회는 중문면을 비롯한 각 면에 여러 가지 형태로 조직됐다. 해녀회는 특히 해녀가 많은 성산면, 구좌면 지대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그 중에서도 하도리, 종달리, 연평리, 세화리 등의 지역에서 가장 발전했다. 

이와 같은 조직적인 대중 운동 속에서 당 조직이 성장하고 특히 구좌면 지역에서 당의 중핵적 조직으로서의 혁우동맹이 가장 성장했다. 이러한 해녀의 생존권 투쟁은 동료 김옥련(金玉蓮·하도), 부덕량(夫德良) 등 3인을 정점으로 세화에 해녀들을 집결시켜 시위 운동을 전개, 동년 1월 16일 주동 해녀 20여 명이 체포됐다. 그는 김옥련과 함께 목포유치장으로 구인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집행유예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재일 여성 교포들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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