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방폭포의 한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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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학, 제주대학교 지리교육전공 교수·박물관장/논설위원

정방폭포는 제주의 대표적인 폭포의 하나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폭포로 알려져 있다. 폭포의 웅장함과 해안 절경이 어우러져 조선시대에도 관료나 시인 묵객들이 찾았던 명소였다. 조선 후기에는 영주십경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경관적 특성과 역사성을 바탕으로 2008년에는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최근 정방폭포의 한자 지명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정방폭포의 한자 표기는 ‘정방폭포(正房瀑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원래 정방의 한자 표기가 ‘정방(正方)’이기 때문에 ‘정방폭포(正方瀑布)’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방폭포의 지명은 폭포 위쪽에 있는 수원지인 정방연(正方淵)에서 유래한다. 정방연은 민간에서 ‘정무시’ 또는 ‘정모시’ 등으로 불리는데 ‘시’는 물이 고여있는 못을 의미하는 ‘소’의 음가가 변한 것이다. 따라서 ‘정방연’은 ‘정모소’의 음차와 훈차가 결합된 표기로 ‘정’은 음차, ‘방연’은 훈차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모연(正毛淵)’이라 하여 ‘정모’는 음차, ‘연’은 훈차로 표기했다.

이후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서는 ‘정방연(正方淵)’으로 표기했다. 이원진의 『탐라지』, 이익태의 『지영록』, 이형상의 『남환박물』 등에는 ‘정방연(正方淵)’으로 되어 있다. 고지도에서도 지명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1703년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와 1706년 목판본 『탐라지도』,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72년 『제주삼읍전도』에는 ‘정방연(正方淵)’으로 되어 있다. 18세기의 『제주삼현도』에는 ‘정방연폭(正方淵瀑), 『전라남북도여지도』에는 ‘정방폭(正方瀑)’이라 해서 폭포를 의미하는 폭(瀑)자를 붙였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정방(正房)’으로 표기하는 흐름도 나타났는데, 주로 시문집에서 볼 수 있다.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익한은 ‘정방연(正房淵)’이라는 시를 남겼다. 19세기에는 정방폭포가 영주십경의 하나로 인식되면서 ‘정방(正房)’이라는 표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1841년 이원조 목사는 『탐라록』에서 영주십경을 제시했는데, 여기에 ‘정방관폭(正房觀瀑)’이란 표기가 보인다. 이어 이한우의 영주십경에는 ‘정방하폭(正房夏瀑)’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후 여러 학자의 영주십경 품제에서는 ‘정방(正房)’으로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1899년 『제주군읍지』에 수록된 제주지도에는 ‘정방폭포(正房瀑布)’라고 표기되었고, 해방 이후 1954년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에는 ‘정방폭(正房瀑)’으로 표기했다. 해방 이후 제작되는 대부분의 지도에서도 ‘정방폭포(正房瀑布)’로 표기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정방(正方)’을 ‘정방(正房)’으로 표기한 것은 표기의 오류라고 보기는 힘들다. 애초 정모시를 ‘정방연(正方淵)’이라는 한자로 표기하면서 정방이라는 음가가 오랫동안 굳어졌고 이러한 음가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방(方)’을 ‘방(房)’으로도 표기한 것인데, 후대에는 ‘방(房)’으로 표기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현재의 ‘정방(正房)’이라는 표기에 이른 것이다. 지명도 다른 사물처럼 변화하는 속성을 지닌다. 다양한 지명 표기가 서로 경합하기도 한다. 이 같은 지명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정방(正房)’이라는 표기도 분명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변경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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