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상점·양조장 운영해 부 축적…지역 학교 설립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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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대현, 조천초에 기금 쾌척
 손대흥, 조천면의원 등 역임
 손시영, 일본서 가톨릭 전도
 손인규, 신흥초 설립에 기여
 송건호, 학생전위동맹 활동
 송권은, 표선초·고 개설 주도
상점과 양조장을 운영해 큰 부를 이룬 송권은은 정의보통학교 이설을 추진하고 표선상업고등학교 개설에 앞장서는 등 지역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사진은 표선고등학교(옛 표선상업고등학교) 전경.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상점과 양조장을 운영해 큰 부를 이룬 송권은은 정의보통학교 이설을 추진하고 표선상업고등학교 개설에 앞장서는 등 지역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사진은 표선고등학교(옛 표선상업고등학교) 전경.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손대현孫大賢:1894∼1965, 전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부의장 손유원의 조부.

 조천읍 신흥리 ‘옛-개’에서 태어나 신흥리장을 역임했다. 조천리로 이주해 1960년 조천초등학교를 개축할 때 당시로서는 거금인 150만원을 쾌척했다. 

 

 

 

 

 

 

▲손대흥孫大興:1888∼1960. 밀양손씨, 호 침암(沈庵), 한학자. 

조천읍 신흥리에서 태어나 제3대 신흥리장과 조천면 제2대 면의원에 당선됐다. 신흥리지 서문을 썼다. 일제강점기 6년간 조천면 협의회원을 지냈다. 손화규의 부친이다.

▲손시영孫時英:1926(일제강점기)~?, 재일교포, 일본 가톨릭 전도사, 전일본(全日本) 레스토랑경영자협회 회장,

조천읍의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 김대진(金大珍)과 어머니 부대봉(夫大奉)의 아들로 태어나 전남 순천중학교를 졸업, 1945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關西’대학 예과를 거쳐 교토(京都)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세철학을 전공했다. 한때 교포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안토니오 갈비슈츠 신부와의 상봉으로 10년간 가톨릭 전도사로서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에 참가했다. .

규수(九洲)의 오이따현(大分縣) 나카츠(中津)에 살면서 가톨릭교의 신자가 되고 농업에 종사했다. 

1965년에 나카츠(中津)에서 ‘남산(南山)’을 창업해 레스토랑 경영의 길로 들어갔다. 그의 저서 ‘공생주의에의 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글을 쓰고 있다.

‘50회째 맞는 8월 15일, 이 날은 일본에서는 패전기념일, 패전이나 항복이란 말은 일본인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듯하여 언제나 종전기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날은 일본인이라면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슬로건을 내걸고 그 밑에 짓밟힌 한국·중국 사람에게는 개방기념일, 해방기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이 8월 15일은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츠코 제비엘이 일본에서 크리스토교의 종교가 가고지마<鹿兒島>에 상륙한 날이니 지금(1995년)부터 446년 전의 8월 15일에 처음으로 크리스트교의 씨를 뿌린 날이기도 하였다. 올해 50회째를 맞는 패전기념일의 날에 일본이란 땅덩이 위에 16세기 반쯤 전에 그렇게 말한 것처럼 무엇이 새로운 씨를 뿌리는 것일까? 세계에 통용되는 새로운 사상을 얻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볼 필요가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레스토랑으로 ‘남산’그룹을 형성해 몇 번의 실패와 경험을 거치는 가운데 유니크한 ‘철학(徹學)’ 경영 사상을 전개, 특히 ‘인간대학’의 창립자로서 사상  운동·실천 운동이 여러 방면에서 주목받아 강연과 지도를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저서는 ‘しス卜ラン革命じ挑む’, ‘食べる’, ‘文化をつくる’, ‘21世紀を拓く食文化の創造’, ‘廢鷄更生える’, ‘共生の徹學’, ‘生きる’, ‘人間大學入門’ 등이 있다.

▲손인규孫仁奎:1914∼1988, 밀양손씨, 조천읍, 손유섭의 선친. 

 신흥리 ‘왯-개’에서 태어나 1927년 그에 의해 발기된 소년회(少年會)의 후일 재무(財務)를 담당.

1949년 그는 서둘러 공비(共匪)를 방어할 4․3마을 축성을 쌓아 신흥리 민보단(民保團)이 분초막(分哨幕)을 지키도록 했다. 

또 신흥리 재일본학교설립추진위원회 회장으로 제주를 방문해 ‘엉왓’에 부지를 정하고 건물 5개 교실, 교장 관사 1동, 변소 1동을 세워 1965년 3월 9일 신흥국민학교 개교식을 가졌다. 이후에도 거금을 희사했다.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초등학교 운동장에 그의 송덕비가 세워졌다.

 

 

 

 

 

함덕리사무소 앞에 있는 동지애도비. 송건호 등이 항일 운동에 헌신한 동지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함덕리사무소 앞에 있는 동지애도비. 송건호 등이 항일 운동에 헌신한 동지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송건호宋健浩:1909(융희3)~?, 서울 학생 전위동맹(前衛同盟)의 항일 활동 및 함덕리 추모비 건립 항일 활동, 산북 함덕리 출신.

1930년 제주청년동맹 맹원 김두성(金斗性), 김일준(金日準) 등은 동지들과 함께, 함덕 마을의 부녀자 한승렬(韓承烈) 등을 협성청년회의 노동야학에서 한글을 가르치면서 항일 민족 사상을 고취했다. 그는 동지 9명과 함께 체포돼 1931년 4월 12일 5명이 목포검사국에 송치, 12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한편 서울 양정(養正)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의 여파로 조선 학생전위동맹에 가담, 1930년에 탄로나 관련자가 검거됐다. 제주인으로서는 김순희(金淳熙·중앙고보 4년·남원리)가 중앙 집행위원이었으며 송건호는 양정고보 학생 전위동맹의 문화선전부를 담당, 3·1 운동 11주년 기념일에 항일 운동을 계획하던 중 1930년 2월 하순 검거돼기도 했다. 또 1931년 1월 15일 일본 도쿄 순천당(順天堂)병원에서 함덕리 출신 한영섭(韓永燮)이 사망, 동월 19일 그 시신이 향리에 도착해 동지장으로 할 것을 결의했다.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여 무산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 한 그대는 갔지만 그대의 주의(主義) 정신은 동지마다 계승하여 분투할 것이니 고이 진좌(鎭座)하시라.”는 만장 등을 내걸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함덕리 이민 일동의 이름으로 ‘애도 부생종(夫生鍾) 송건호(宋健鎬) 한영섭(韓永燮) 김재동(金才童)군’이란 비석을 새로 세우고 비문은 일제 당시의 글월을 그대로 새겼다.

▲송권은宋權恩:1884(고종21)~1968, 사업가, 전 제주도의원 송방식의 선친, 본시 애월읍 하귀리 출신, 본관은 여산, 호는 압정(鴨汀), 정가(正嘉)공파.

애월읍 하귀리(귀리) 송태희(宋泰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사에 꿈을 두어 1904년 성산읍 온평리(열온이)로 갔다. 서당 훈장을 하던 중 1915년 큰아들 송방식(宋邦植)을 낳으니 이듬해 표선리(당-캐)로 이주(移住)해 상점을 마련했다. 정의(旌義)보통학교 이설추진위원장으로 공덕비(功德碑)가 교정에 있다. 

해산물과 곡물을 매입해 반출, 또 소금과 포목, 잡화 등을 들여와 재력을 이루어 소주(燒酒)공장 남창양조장을 창업해 번창했다. 근친을 불러 들여 표선면의 유력한 가문으로 키웠다. 성읍리(정의-골) 소재로 1937년 9월에 표선리(당-캐)로 옮겼다.

또 해방 후 표선상업고등학교 개설에도 앞장섰다. 그의 공덕비(功德碑)는 표선교 교정과 리사무소 구내, 표선면충혼묘지 안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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