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로운 전설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품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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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마라도·가파도
모슬포서 11㎞ 지점 마라도
섬 전체 천연기념물로 지정
할망당 허씨 이야기 전해져

고인돌 수십 개 있는 가파도
1865년부터 사람들 거주해
신유의숙 설립한 김성숙과
제주 근대 첫 여의사 고수선
향토사학자 김태능 등 배출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도 청보리밭 풍경. 1865년 대정지역에 큰 흉년이 든 이후부터 가파도에 사람들이 정주하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고인돌을 볼 수 있고 매년 청보리 축제가 열려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도 청보리밭 풍경. 1865년 대정지역에 큰 흉년이 든 이후부터 가파도에 사람들이 정주하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고인돌을 볼 수 있고 매년 청보리 축제가 열려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대정현은 현성이 있는 대정고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산방산과 안덕계곡을 지나 지금의 서귀포시 법환동 지역을, 서쪽으로는 모슬봉 너머 차귀도를 포함해 한경면 판포 지역을 경계로 해서 이루어졌다. 

바다는 희망과 두려움의 상징이다. 바다의 수평선은 무지개처럼 호기심과 희망도 주지만, 또한 공포심도 일게 한다. 제주선인들은 오래전부터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바람을 지혜롭게 이용했다. 바람을 맞으며 섬 속의 섬인 마라도와 가파도로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파도가 0.84㎢, 마라도는 0.3㎢의 넓이로,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지형과 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있으며, 특히 국유목장·전설·표류·이양선 출몰 등의 역사 문화가 숨겨져 있다.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 마라도

모슬포에서 11㎞ 지점에 있는 마라도에는 1883부터 김씨·나씨·한씨 등의 어민들이 입도해 살기 시작했다. 나무들로 무성했던 마라도에 불을 넣어 경작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뱀들이 뭍으로 빠져나가 마라도에는 뱀이 없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1915년 등대가 설치되고, 1953년 가파교 부설 마라분교장이 개교됐으나, 2016년부터 적령 어린이가 없어 분교장도 휴교 중이다. 

마을 형성의 우선 조건이 용천수다. 그러나 용천수가 솟지 않은 마라도에 사람들의 정주는 그만큼 늦어졌다. 대정읍 가파리 산1번지인 마라도 주변은 2000년 국가지정 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423호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에는 애처로운 전설이 깃든 할망당이 좌정해 있다. 

마라도 할망당에서 기도를 하는 주민들.
마라도 할망당에서 기도를 하는 주민들.

마라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시절, 허씨 처녀가 아기업개로 하모리 이씨 주인을 따라 마라도에 갔다. 아기업개란 어린아이를 업어주고 돌보는 나이 어린 아이를 말한다. 

며칠이나 불어오는 태풍으로 섬에 갇혀 지내던 어느 날 밤, 해녀들과 뱃사공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백발노인은 사람을 공물로 바쳐야 이 섬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전했다. 해녀 여럿이 의논한 끝에 어린 처녀 허씨만 남겨놓고 섬을 떠나야 했다. 

다음 해 마라도에 해녀들이 다시 물질하러 가보니 지금의 할망당이 위치한 자리에 허씨 처녀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 마라도에서는 허씨 처녀의 외로운 영혼을 당신으로 모시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마라도 할망당은 마라도 본향당, 처녀당 또는 아기업개당으로 불리고 있다. 

▲소들의 섬 가파도와 제주도 목양장

1698년(숙종 24) 제주목사 유한명이 우도에 말을 키우는 우도목장을, 1751년(영조 27) 제주목사 정언유가 가파도에 소를 양육하는 가파장을 개장했다. 

이후 1823년(순조 23) 제주위유어사 조정화가 우도와 가파도에 있는 목장이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험지이므로, 두 섬의 마소를 부근의 목장으로 옮기고 백성들을 섬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도록 조정에 아뢰었다. 1842년(헌종 8) 이원조 목사가 재차 우도와 가파도를 개간하는 것이 제주섬 백성들에게 이롭다고 아뢰어, 조정으로부터 개간 허락을 얻어냈다. 

이원조 목사가 임금에게 올린 장계는 다음과 같다. 

“우도의 말 247필과 가파도의 소 70여 두가 장부에 올라 있습니다. 그러나 방목한 후 방치하여 때로 사람을 보내어 점검하지만, 마소들이 사람에 익숙지 않아 놀라서 미쳐 날뛰므로 재갈을 물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가 된 지 오래되었고, 갈대가 썩어 쌓이고 마소의 분뇨로 질퍽한 곳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토양이 비옥하여 수백 집이 살기에 넉넉하고, 몇천 이랑의 경작지를 일굴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말을 키우는 목마장이 많았고, 소를 기르는 우목장은 적은 편이었다. 조선시대 제주도에 설치된 국영 우목장으로 황태장(1소장 안), 천미장(10소장 안), 모동장(대정현 소재), 가파도의 별둔장 등 4개 처가 설치돼 있었다. 10개의 소장에서도 약간의 소를 길렀다. 

1840년 영국 선박에 의해 가파도에 방목 중인 흑우가 약탈당한 일도 있었고, 또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조정에서는 1842년 흑우를 인근 모동장(毛洞場)으로 옮기도록 했다. 

모동장은 대정현 내 신도·무릉·영락리와 고산평야 일대에 설치된 우목장으로, 처음엔 몽고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도리 일대를 서장, 무릉리를 중장, 영락지를 남장이라고 불렀고, 1840년 당시 소 637두를 길렀다. 

남도영의 ‘제주도 목장사’에 의하면 말과 소 이외에 양, 돼지, 염소, 노루, 고라니, 사슴 등을 양육하는 목양장(牧養場)도 마련돼 있었다. 

사라봉에 양을 기르는 양잔(羊棧), 집돼지를 기르는 제주 사창 근처의 저권(猪圈), 염소를 놓아먹이는 소섬과 비양도의 고유(羔宥), 노루를 기르는 장권(獐圈, 고라니 사육장인 궤장, 사슴목장인 녹장(鹿場) 등이 있었다고 한다. 

▲교육으로 수많은 인물을 낳은 가파도

1842년 가파도에 방목 중인 소들을 인근 목장으로 옮긴 이후 농번기에만 사람들이 가파도를 왕래하면서 경작을 하다가, 1865년 대정 지방에 큰 흉년이 든 이후부터 주민들이 가파도에 정주하기 시작했다. 

2010년 누구나 가고 싶고 찾고 싶은 명품 섬 베스트 10에 선정된 곳, 수십 개의 고인돌을 볼 수 있는 신비의 섬이자 청보리 축제의 섬 가파도. 옛 이름은 더위섬, 더푸섬, 개파도 등이다.

1921년 신유년, 가파초등학교 전신인 신유의숙을 설립해 가파도 최고 개척시대를 이룬 김성숙과 제주 최초 근대 여의사인 고수선(남편은 제주 최초 근대 의사 김태민), 제주도사논고와 제주도약사 등을 집필한 향토사학자 김태능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이 바로 가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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