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부녀자 문맹 퇴치에 열정…계몽 통한 독립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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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식, 조선 후기 대정현감 역임…진수당 중수·세금 감면으로 칭송
 윤중선, 동포 항일 활동 격려하는 ‘미국의 소리’ 청취하다 징역 선고
 윤창석, 2006년 대통령표창…광복 이후 제3대 조천면장으로 취임
 이갑문, 일제의 만보산 농민 학살 사건에 항거해 학교에 격문 살포
1930년 조천리에서 태어난 윤창석은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 야학을 통해 부녀자에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등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사진은 윤창석이 나고 자란 조천마을의 1960년대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30년 조천리에서 태어난 윤창석은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 야학을 통해 부녀자에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등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사진은 윤창석이 나고 자란 조천마을의 1960년대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윤정식尹正植:1837(헌종3)~1902(광무6), 일명 경식(京植), 무신, 대정현감.

신좌면(新左面) 북촌리(뒷-개) 윤응철(尹應哲)의 아들로 태어나 무과에 급제했다.

1883년(고종20) 6월에 김문주(金汶株)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임명되고, 1884년 1월에 그만뒀다.

1885년(고종22) 5월, 고용진(高龍振)의 후임으로 현감에 도임하고 1886년 5월에 떠났다. 한편, 1887년(고종24) 8월, 은덕중(殷德仲)의 후임으로 재차 대정현감에 도임하고 1888년 10월에 떠났다.

또 재임 중에 늠료(지방 관청의 봉급) 100냥을 가져 대정군의 진수당(進修堂)을 중수하고 아울러 세금을 감면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그에 대한 공적비를 세웠다.

1883년(고종20) 10월, 명월만호 윤정식이 병으로 사임을 요청하니 제주목사 심형택(沈亨澤)은 조정에 “본인으로부터 담벽증(痰癖症)이 겨울에 더욱 심하니 회생하기 어렵다고 보고해 오니 변방 방호의 임무가 중하니 삼읍 출신중 삼망(三望)을 갖추어 해조(該曹)에 보고하니 선처 바랍니다.” 라고 보고했다.

또 심현택(沈賢澤) 목사 재임 시 1884년(고종21) 4월, 관청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이어서 전 만호 김응평(金膺平)은 해우지역(廨宇之役)을, 전 수문장 강경순(康敬淳)과 전 만호 윤정식은 성첩지역(城堞之役)을 담당해 3개월 만에 대수선을 마쳤다.

이에 목사는 김응평, 강경순, 윤정식 등에게 표창을 내리도록 조정에 상신했다.

▲윤중선尹重宣:1927(일제강점기)~?, 제주 무선통신소에서 단파(短波) 방송 ‘미국의 소리’ 청취에 따른 항일 활동, 일명 윤한구(尹漢求) 혹은 윤성수(尹性守).

1945년 5월 17일 청진지방법원에 의해 소위 치안유지법·육해군 형법·조선 임시 보안령 위반으로 김운제, 김귀석은 각각 징역 3년을, 김상희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윤중선은 징역 1년 6월을, 고영수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산북 이도리(제주-성안) 202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1944년에 이르러 패색이 짙어가고 해외 동포의 항일 운동도 격렬해졌다.

동년 5월에 주중국(駐中國) 미(美) 공군사령관 웨더마이어 장군의 원조로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에 낙하산 훈련을 통고하자 망명 정부에서는 한반도 상륙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또 동년 7월에는 일본군이 사이판도(島)에서 전멸하고 8월에 프랑스 파리의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연합국 측으로 뒤바뀌었다.

미국에 사는 교민(僑民)들에 의해 단파(短波)를 통해 조국의 동포들에게 격려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달됐다.

▲윤창석尹昌錫:1913(일제강점기)~1949, 독립운동가, 혁우동맹의 항일 활동, 본관 파평이며 윤성종(尹性鍾)의 차남.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 2월 14일 일경에 의해 체포됐다.

1948년 7월 제3대 조천면장으로 취임해 4·3사건의 와중에 불과 4개월 재임하고 그만뒀다.

1949년 12월 18일 서북청년단 단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려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929년 8월 13일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의 정기총회 때 부녀자에 대한 노동야학으로 문맹자의 기초 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상중동반·중동반·하동반 등 3개 반으로 나누어 교양과 기초 지식을 가르쳤다.

이 일은 청맹원(靑盟員) 김순탁(金淳鐸), 김시추(金時秋), 김서호(金瑞鎬), 김지환(金址煥), 윤창석 등이 담당했다.

그는 1930년 4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또 1932년 1월 해녀의 항일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해서 체포당했다.

특히 혁우동맹(革友同盟) 맹우(盟友) 김한정(金漢貞), 강석만(康錫萬), 이장영(李章瑩), 이병성(李炳星) 등과 함께 상가에 가서, 자살한 부경득(夫庚得)은 부친 부대혁(夫大赫)이 잘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제례를 방해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이 일을 빌미로 체포된 것이다.

그는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가택 침입 및 예배 방해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항소를 하지 않아 미결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조천인민위원회 치안부장을 역임했다.

▲이갑문李甲文:1913(일제강점기)~?, 만주(滿洲) 만보산(萬寶山) 농민 학살에 따른 학생의 항일 활동, 일명 이성효(李成孝), 본관은 고부.

이창건(李昌建)의 딸로 산남 중문리(중-물)에서 태어나 8세 때 대정읍 하모리(모실-개)로 이적, 사립 동덕(同德)여자고보에 재학 중이었다.

1931년 7월 일본이 만주에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 일본 군벌(軍閥)에 의해 우리 농민 교포 대다수가 학살당했다.

만보산사건이란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만보산 지역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이다.

이러한 분쟁으로 한국인의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이 분쟁을 구실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했다.

이때에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학생 김만유(金萬有·대정)를 비롯한 4명이 일제의 만행에 격분해 동년 7월 17일 ‘전조선 혁명적 학생들에게 격(激)함’이라는 격문 2000매를 등사, 서울의 각 중등학교에 살포했다.

이때 이갑문은 이 격문을 몰래 자기 학교에 살포하고 또 가파도 출신으로 실업전수(實業專修)학교 학생 김무안(金務安)도 격문 150매를 자기 학교에 배포하면서 항일 활동을 펼쳤다.

1932년 7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 일이 탄로나 6명이 체포될 때 김무안은 국외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고, 김만유는 징역 1년을 복역했다. 김만유는 2003년 현재 일본 도쿄에 거주하며 아들 6명과 사위 4명 모두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갑문은 1945년 6월 전남 목포시의 오창진(吳昶珍)과 결혼, 서울 종로에서 사업을 하다가 1950년 6·25전쟁 직후 월북하였다는 설과 납치당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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