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매(雪中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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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매화는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꽃도 다른 나무에 비해 일찍 핀다. 다들 깊은 잠 속인데 매화는 일찌감치 눈을 뜬다. 봄을 기다리는 타고난 감성 탓일 것이다. 눈발 성성한 1월 말에서부터 피어 연중 들머리 짓는다. 이를 일러 꽃의 우두머리라고 ‘화괴(花魁)’란 별명까지 가졌다.

선비들이 좋아하는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에서도 으뜸으로 줄 세웠다. 차가운 눈 속에 피어 ‘설중매’다. 눈 속에 꽃이 어디 쉬운가. 한겨울 혹한의 절정을 무릅쓰고 굳은 기개처럼 피어나는 꽃과 은은하게 배어나는 매향에 말을 잊는다. 옛 선비들은 매화가 지닌 결곡한 절개와 높은 지조를 능히 읽었으리라.

김홍도는 무척이나 매화를 사랑했다 한다. 하루는 한 사람이 매화를 팔겠다 하나, 돈이 없어 살 수 없었다. 때마침 어떤 이가 그에게 그림을 사겠다 청하므로 3000냥을 받아, 2000냥을 주어 매화나무를 사고 800냥으로 술을 사 벗들과 함께 매화를 감상하며 마셨다 한다. ‘매화음(梅花飮)’한 것이다. 나머지 200냥으로는 쌀과 나무를 들였으나 하루 지낼 것밖에 되지 않았다 한다. 평생 빈한해도 의연함을 놓지 않았던 화선(畫仙)다운 고아 무비의 인품이다. 매화에 이르는 게 예인의 궁극인가.

조선 중기의 문신 신 흠(申欽)이 한 말이 지금도 회자(膾炙)된다.

“매일생(梅一生) 한불매향(寒不賣香), 매화는 늘 추위 속에 살지만 향을 팔지 않는다.” 옳다고 여기는 것을 굳게 지키고 절개가 굳어 굴종하지 않는 인품을 매화에 빗대 ‘견개(狷介)’하다 한 것이다. 선비가 매화요 매화가 선비라 함 아닐까.

퇴계 이 황은 “매화에 물을 주거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끔찍이도 매화를 귀히 여겼나 보다.

이육사는 <광야>에서,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의 의지를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라 했다. 매화를 품어 시대를 나려 했지 않을까.

여말에 미모와 재주를 겸비한 ‘설중매’라는 기생이 있었다. 그냥 설중매라 이름하지 않았다. 일화가 있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업한 뒤에 개국 공신들을 한자리에 모아 위로하는 주연에 설중매도 불려 나왔다 한다. 술기운이 오른 정승 하나가 설중매에게 농조로, “내 말을 들으니. 너는 아침에 동쪽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잔다던데, 오늘 밤은 나와 같이 지냄이 어떠하냐?” 짓궂게 물었다.

그러자 설중매 답하기를, “참으로 고명하신 대감의 말은 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침에 동쪽에서 밥을 먹고 서쪽에서 잠을 자는 기생이오나, 어제는 왕 씨를 섬기고 오늘은 이 씨를 섬기는 대감이니 좋은 짝이 되겠습니다.”고 했다.

비록 취중이긴 하나 설중매의 의표(意表)를 지른 한마디에 자리에 같이한 자들 모두 부끄러워 돌아갔다고 한다. 직설하지 않고 한번 돌려 완곡하게 고관 대직들의 아픈 데를 찌른 한마디 말, 의뭉한 듯 서슬 퍼렇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한 〈하여가〉가 떠오른다. 만약 이방원 앞에 설중매가 있었다면 무어라 했을 것 아닌가. 분명코, 매화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설중매!

매화가 핀 게 언젠가. 이젠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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