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조선인 차별에 대항할 길은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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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선, 동덕여고보 학생 항일 운동…독서회 활동 등으로 옥고
 이경수, 일본에서 중등교육 마치고 돌아와 오현중 설립 노력
 이경조, 재일교포 화가…한국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 예술인
 이경천, 애월읍 금성리 출신 교사로 신산초·애월교 등서 재직
 이계징, 창암체 익혀 필체 수준 높아…지극한 효심으로 칭송
 이공우, 학생 계몽·동지 규합 앞장서다가 검거…광복 후 석방
항일 운동가 이공우는 한때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학도근로보국대 대원으로 고베시 소재 동양 다이가스트 합작회사에서 노동했다. 사진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했던 제주 노동자들의 모습.
항일 운동가 이공우는 한때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학도근로보국대 대원으로 고베시 소재 동양 다이가스트 합작회사에서 노동했다. 사진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했던 제주 노동자들의 모습.

▲이경선李景仙:1914(일제강점기)~?, 서울 동덕여고보 학생 항일 활동, 광복 후에 조선부녀총동맹 중앙 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 본관은 고부.

이도일(李道一)의 장녀로 경기도 안양(安養)에서 태어났으나 본적은 대정읍 가파도(겔파-섬)다. 아버지 이도일(1897~1971)은 한학자로 광복 후 대정중학교 초대 교장이다.

그녀는 서울의 동덕(同德)여고보에 입학, 동교의 교사 이관술(李觀述·경남 울산)의 지도로 일본으로 건너가 의대(醫大)를 나왔다. 의사 생활이 최후의 목표였다.

이경선은 일본 고베(神戶)시의 ‘나카노(中野)’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효고현(兵庫縣)에서 1941년 12월 9일 체포당하고 1942년 10월 23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오영조(吳榮造·서울)와 만혼(晩婚), 1946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 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했다.

동년 10월 이재유로부터 숙명여고보 및 기타 여학생에 동지를 획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숙명여고보 3학년 김주원(金周媛)의 집을 방문, 독서회 조직에 대해 찬동을 얻어내고 또 동교의 방봉랑과 신진순으로부터 승낙을 받아 독서회를 조직했다.

독서회 항일 활동으로 1933년 1월 종로경찰서에 검거됐으나 훈방됐다.

동년 3월 동덕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梨花)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해 1학기 수료 후 도쿄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자퇴했다.

이해 10월부터 이재유(李載裕·함남 삼수) 그룹에 참가해 숙명여고보, 동덕여고보의 독서회 학생운동 및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그 후 피신하는 방편으로 조선 직물주식회사(조선방직) 인견(人絹)공장의 여공으로 취직해 여공들을 동지로 포섭했다.

경기도·강원도를 중심으로 인텔리 노동자·직공 등을 망라한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으로 활동을 하던 중 1934년 2월 21일 체포됐다.

▲이경수李慶守:1914~?.

대정읍 인성리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해방 이후 오현중학교 설립에 노력했다. 오현고등학교 교장, 제주여자중고 교장을 역임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제주예수교장로회제주노회 성격학원 이사장을 맡았다. 말년에 한라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경조李景朝:1936~?, 서귀포시에서 출생, 재일교포 화가.

1956년 서귀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 1968년 니키카이(二紀會)전(展) 입선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개인전은 물론 각종 권위 있는 초대전에 출품작을 내놓고 있으며, 예술을 통한 국제문화 교류에 일조를 하고 있다.

‘한국예술평론가협회’가 선정한 2003년 올해의 최우수 예술인 및 공로예술인상을 수상했고 2004년 제주도가 선정한 제주를 빛낼 사람들 30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경천李京天:1927년(일제강점기)~?, 경주이씨 상서공파, 초등교사, 교장.

미군정(美軍政)에서 유죄의 형을 받다.

애월읍 금성리(모실-개)에서 태어나 광주농업학교 5년 졸업, 1945년 광주사범 강습과를 수료, 성산면 신산(新山)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 1946년 애월교로 전입한 우수한 교사였다.

담임 아동들에게 적기가(赤旗歌)와 인민항쟁가를 몰래 가르쳤다.

구엄국민학교에서 ‘애월면 민주청년동맹’ 결성대회에 아동들을 인솔해 참가, 1947년 4월 11일 그는 3·1시위사건 제3차 미군정(美軍政)재판에서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징역 8월, 벌금 5000원형(刑) 판결을 받아 면직됐다.

목포에서 초등교사로, 경기도 소사(素沙)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950년 6·25를 만나 행방이 묘연해져 여러 억측(臆測)이 일어났다.

▲이계징李啓徵:1840(헌종6)~1914, 한학자, 서예가, 일생 훈학에 종사, 자는 경운(慶運), 호는 이락당(二樂堂). 본관 고부.

제주시 도련리(도련-들) 매촌(梅村)에서 태어나 전남 장성의 한학자 기노사(奇蘆沙)의 문하에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학문을 배웠다.

또 창암(蒼嵒) 이삼만(李三晩)의 필법을 좋아해 늘 창암체를 익혀 글씨의 수준도 높였다. 제주군수 김중배(金重培)는 그의 효심과 우애에 감복해 이락당의 집으로 찾아가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이락당은 함덕리에서 훈학에 종사,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879년(고종16) 10월 아우 이후징(李厚徵)이 해난 사고로 익사하자 그 시신을 못 찾아 애가 탈 때 이락당이 해변으로 달려가 호곡하며 초혼(招魂)을 하자 기적이 나타나 그날 밤 시체가 떠올랐다.

죽은 아우를 등에 업고 집으로 옮겨 함께 잠자리하면서 우애를 교감했다. 이 일화는 형제의 우애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교훈을 일깨워 준 좋은 본보기이다.

▲이공우李公雨:1927(일제강점기)~?, 일본에서의 학생 항일 운동.

조천읍 신흥리(왯-개)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시(神戶市)에 살게 됐다.

사립 육영상업학교에 입학해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때 4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동교 학생들을 계몽하고, 동지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곧 일제에 탐지돼1945년 1월 17일 모두 검거되고 동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미결수로 석방돼 해방의 기쁨을 맞게 되었다.

그는 동급생 윤도홍(尹道洪), 황보석(皇甫石) 등과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학도근로보국대(學徒勤勞報國隊)의 대원으로 고베시 소재 동양 다이가스트 합자회사에서 노동을 하면서 친밀해졌다.

그들은 “조선인은 상급학교 입학을 제한당하고, 해군 예과 연습생 등으로도 채용되지 않고 있다. 이공계의 진학도 조선인을 위험시하여 차별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 우리들 조선 민족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길밖에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재 학생 등 각 방면의 조선인들이 독립 운동을 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 조선 학생들도 대동아전쟁을 계기로 일본 타도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단결하여 민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높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기다려 이에 참가하고, 그들의 원조로 독립이 실현되게끔 상호간에 독립 의사의 앙양도 도모하여야 한다”고 협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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