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용수와 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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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찬 수필가

마늘밭에 비료를 주고 농업용수 수도꼭지를 튼다. 군인들의 열병같이 질서정연하게 설치된 관수 시설 따라 분사되는 수돗물이 가랑비 내리듯 밭 전체를 적시고 있다. 천지개벽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꿈도 꾸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하늘에 의지하는 농사였다. 귀 덮인 모자를 쓰고 밟던 보리밭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새로운 작물이 들어섰다. 겨울철 아랫목에서 삶은 고구마 나눠 먹으며 정을 나누던 모습이 사라졌다. 농번기·농한기가 없어지고 다양한 작물로 인해 일 년 내내 바쁘다.

다양한 작물 뒤에서 응원하면서 쉴 틈 없이 일터로 나가게 하여 소득증대에 기여한 것은 농업용수다. 1970년대 중반 농업용수 관정개발이 본격화되었다. 과수원과 비닐하우스 일반 농사할 것 없이 필요한 게 물인데 댐도 없고 강도 없으니 의지할 곳은 지하수뿐이다. 농업용수의 95%가 지하수다. 물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행정에서는 소규모 급수체계를 개선 광역화하는 사업을 2024년까지 마무리할 방침이라고 하지만, 미덥지가 않다. 채워지는 지하수량보다 뽑아 쓰는 양이 만만치 않다는 걸 쉽게 알 수가 있다. 바닷가에 썰물 때면 지하수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흔히 볼 수가 있었는데 근래 자취를 감췄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바위틈새에서 나오는 물줄기도 힘을 잃었다.

지하수에 채워지는 양 만큼만 뽑아 써야 한다. 남발되는 개발허가에 따라 지하수는 고갈되어 가고 물 부족 시대를 예견하면서도 걸맞은 대책은 세워져 있는지 불안하기만 하다. 치산치수를 통치의 근본으로 삼던 선조의 지혜가 새롭다.

1960년대는 부엌에 있는 물항아리를 채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과였다. 마을 곳곳에 있는 우물에서 허벅 또는 물지게로 지고 날랐다. 우물을 파는 일과 정비하는 일이 당시에는 최고의 선행이다. 따라서 우물가에는 공덕비가 많이 세워져 있다. 그래도 해변 마을은 바닷가에 썰물 때면 암반 틈새에서 나오는 물을 길어 양질의 지하수로 일상생활을 했지만, 중산간은 우마가 먹고 개구리가 뛰노는 연못 한 모퉁이 물을 생활용수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 상수도가 생활화된 후 한참 지나 1960년대 말 상수도 보급 사업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보면서 손뼉 치며 즐거워했다. 비록 개인 수도가 아니라 공동수도이고 줄을 서야 하는 불편도 있지만, 엄청 편리해진 세상이 되었다. 당시 관정은 마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물맛도 좋고 염분도 없어 양질이라고 자랑했는데 10년도 채 되지 않아 염분이 있다고 하여 더 높은 곳으로 관정을 옮겼다.

지하수를 뽑아 올린 빈자리에 바닷물로 채워진 것이다. 이후 광역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얻은 경험으로 볼 때 엄청난 경제 성장에 따른 지하수 사용에 따라 바닷물이 어디까지 왔는지, 바닷속이 황폐화 되어 가는 게 지하수와 관계는 없는지 불안하다.

양질의 물을 도시 사람들에게 팔아야 제주도 경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면 남은 물이라도 절약해서 효율적으로 이용토록 하여 물에 대한 불안은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행정의 몫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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