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제주 여성의 삶을 화폭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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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석, 한국 서양화단 거장
한라산 등 그림 소재로 삼아
장성원, ‘한시작법’에 몰두
지식인 모임 영주음사 복원
장성흠 근현대기 한학자
추사체로 많은 비문 남겨
장수철, 언론인이자 문인
제주서 ‘신문화’ 동인 참가
장시현, 일제강점기 의사
애월 하물 정비에 앞장서
장용진, 제주 출신 항일 운동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온 제주 해녀를 소재로 삼은 장리석 화백의 ‘해조음’(海潮音·176x226㎝·1957년 作). 장 화백은 해녀, 말, 제주의 풍광 등을 소재로 한 다수의 작품을 선보였다. 출처=제주도립미술관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온 제주 해녀를 소재로 삼은 장리석 화백의 ‘해조음’(海潮音·176x226㎝·1957년 作). 장 화백은 해녀, 말, 제주의 풍광 등을 소재로 한 다수의 작품을 선보였다. 출처=제주도립미술관

장리석 張利錫1916(일제강점기)~?, 화가, 제주도립미술관 내에 장리석기념관(紀念館)을 마련, 장화백은 1916년 음력 48일 평안남도 평양시 경제리에서 치과의사 장수현과 안인화 사이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135세 때 1·4 후퇴로 국군의 원산 철수와 함께 부산(釜山)을 거쳐 제주도로 피난, 가족과 헤어지게 됐다.

19543. 제주에서의 4년간 체류생활을 접고 서울로 이주, 그는 2005년 제주도에 110점의 귀중한 작품을 기증해 우리가 크게 감동했다. 이런 기증이 제주도립미술관 건립 사업에 촉매제가 되어 개관을 보게 됐다.

그는 군에 따라가 제주도에 정착했다. 195236세 때 제주도 피난 생활 중 북에서 피난 내려온 이소애와 재혼해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이했다. 화가 손응성, 이봉상 등과 교우를 맺었다.

195741세 때 제6회 국전에 제주의 해녀를 그린 기념비적 대작 해조음을 무감사로 출품했다. 196145세 때 제10회 국전 추천작가로 추대됐다. 198165세 때 국민훈장 석류장(石榴章)을 수상했다. 200589세 때 642의 고향인 제주도에 자신이 소장해 온 작품 110점과 화구를 기증하기 위한 협약서를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에서는 제주도립미술관 안에 장이석기념관을 건립하고 작품을 영구 전시하기로 했다.

미술사를 전공한 김영호 중앙대교수는 “2005년 장화백은 제주도에 작품 110점을 기증하기로 협약, 2007년 말 작품을 보내왔다. 후속 사업으로 개인화집을 2008년 발간, 기념관 후정에 설치될 초상조각을 제작 중에 있다. 또한 20096월 개관전시에 맞추어 작품 110점을 기증 작품을 모은 작품집을 추가로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화백에게 제주 섬은 제2의 고향이었고 그를 한국의 대표작 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일으킨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장이석 화백의 예술은 신비의 섬 제주도가 지닌 이국적 서정과 제주도 여인들의 강인하고 건강한 삶을 드러내며 제주도의 정체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장이석 화백의 예술은 격변의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밀려드는 구미의 미술사조 속에서도 리얼리즘에 근거한 한국의 구상미술 세계를 새롭게 개척하는 데 일조했다라고.

50여 년 전 6·25 비극 속에서 피난 와 4년 여간 생활화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평양출신 실향민 화가의 작품세계는 우리를 숙연하게 하면서 감동을 안겨준다. 같은 시기에 제주 피난생활을 했던 이중섭(李仲燮), 최영림(崔榮林), 홍종명(洪鐘鳴) 등과 교유하면서 한라산과 해녀, 조랑말, 제주의 오름과 바다 등이 주된 그림 소재가 됐다.

장성원 張聖源1880(고종17)~?. 호는 이헌(二軒), 본관은 인동장씨 남산(南山)파 기일(紀一)공계, 12세손으로 애월읍 곽지리 과오름에서 태어나, 영남파 한학자 일헌(一軒) 장성흠(張聖欽)의 아우, 제주도교육감을 역임한 고연(古淵) 고봉식(高奉湜)의 빙장(聘丈)이다.

한시작법(漢詩作法)에 몰두했다. 그는 일제시대 제주-성안으로 이주했다. 19586119484·3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됐던 한시동호인 영주음사(瀛洲吟社)의 복원을 위해 노력, 도내 동호인(同好人) 96명이 회합해 한시 활동을 활발하도록 추진했다. 영주음사는 근30년을 유지해온 제주 전통 지식인의 모임이었다.

장성흠 張聖欽1867(고종4)~1955(분단시대), 한학자. 한말의 교원(敎員). 서예가. 자는 전일(典一). 호는 일헌(一軒). 본관은 인동, 남산(南山)파 기일(紀一)공계, 재경사업가 장인식(張璘植)의 조부, 애월읍 곽지리 -에서 태어났다. 경상북도 선산의 대학자 허훈(許薰)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허훈은 호가 방산(舫山)이며 방산의 아우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한말의 의병장으로 옥사한 애국자이다.

이러한 거유(巨儒) 형제 밑에서 배운 그는 1874년 향시(鄕試)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 고종 말기에 학교의 교원으로 재임하면서 붓글씨에 열중했다. 일제강점기에 자기의 집안 울타리 안에 무궁화를 심었다는 점은 일헌의 고고한 지조를 보인 것이라고 주변에서 평했다. 특히 추사체(秋史體)를 본보기로 써서 도내의 주요 비문에 그의 글씨를 남겼으며 애월읍 납읍리 마을 안에 소재한 양씨성주왕자(梁氏星主王子)의 비문은 유명하다.

장수철 張壽哲1916(일제강점기)~1993, 분단시대의 언론인. 문인. 6·25 전쟁 때 제주 피난민(避難民). 제주를 소재로 한 시를 가장 많이 발표한 시인으로 알려졌다.

제주신문 논설위원. 호는 순문(舜文) 또는 산명(山鳴). 본관은 전주,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6년 평양상업학교를 졸업, 해방 후 월남, 1950년 합동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6·25의 와중에 제주도로 피난했다.

1951년 피난 문인 계용묵, 김묵, 옥파일 등과 함께 제주에서 신문화동인으로 참가, 제주신문 기자 및 논설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장시현 張時炫1916(일제강점기)~1951, 개업의사, 호는 홍제(洪濟), 본 인동, (太常卿)공 경()(애월장칩) 22세손, 의생 장익준(張益俊)의 아들로 애월 하물-마을에서 태어났다. 1934년 평양의 기성(箕城) 의학강습소에서 1년 과정을 수료, 중앙의원의 김유돈(金有墩)의사 밑에서 의술 습득, 1937년 한지(限地) 의사 시험에 합격, 남원읍 남원리 금롯-에서 홍제(洪濟)의원을 개업했다.

형제(兄弟)간의 우애는 지금까지 전설같이 전해진다. 일찍 선친을 잃은 어린 형제의 정리(情理)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익혀야 할 본보기이다. ‘장고-에는 치수비(治水碑)가 세워졌다. 해방 후에 고향 애월 -마을에서 홍제의원을 경영할 때에 병원 옆 둠방 샘터에 남자 목욕 장소로 만들기를 서둘러 재력가 김신현(金信鉉)에게 돈을 내놓게 하고 공사감독은 애월구장 박형순(朴亨淳)에게 의뢰, 공사를 완료, 해방 직후 애월교와 하귀교의 교의(校醫)로 피명되었다. 그가 타계한 후 주민들은 장공(張公)을 기리어 장공-이라 불렀으며 오늘날은 음운축약으로 장고-이라 한다.

장용진 張溶珍1910(일제강점기)~1983, 협재리 섭지독서회 활동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의 항일활동.

본관 인동, 장보익(張輔翼)의 아들로 산북 협재리 섭지에서 태어나 1930년 일본에서 귀국해 이로서 62명이 구속되고서 일제는 적색농업 조합사건이라 불렀으며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자리 매김이 됐다. 1937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4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즈음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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