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척도' 미터법 탄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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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대혁명이 인류 역사에 큰 전환점을 만드는 동안 또 다른 혁명이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혁명을 담은 필사본의 표지에 나폴레옹은 필기체로 "정복은 순간이지만 이 업적은 영원하리라"라는 메모를 적어 저자에게 건넸다.

필사본의 공동저자는 천문학자 장-밥티스트-조제프-들랑브르와 피에르-프랑수아-앙드레 메솅이었다.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명을 받은 이들은 프랑스 군주정이 사망을 앞두고 있던 1792년 6월 파리에서 출발해 한 명은 북쪽으로, 한 명은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이들은 북극과 적도 사이 거리(사분 자오선 길이)의 1천만분의 1을 새로운 척도로 정하자는 과학아카데미의 혁명적인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직접 거리를 재는 임무를 맡았다.

7년의 여행 끝에 두 사람은 파리 북쪽부터 북극까지, 파리 남쪽부터 적도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돌아왔고 이들의 자료를 합쳐 1천만분의 1로 나눈 것이 오늘날의 미터다.

미국의 과학사학자 켄 애들러가 쓴 '만물의 척도'(사이언스북스 펴냄)는 현대의 표준 도량법이 된 미터법의 탄생에 얽힌 우여곡절을 소개한다.

들랑브르와 메솅이 측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프랑스는 1799년 6월 미터법을 국가 표준으로 할 것을 법령으로 공포했다. 그 이듬해 8월 국제미터법위원회가 발족했고 5년 후인 1875년 5월 17개국이 미터협약에 서명했다. 끈질기게 야드 및 파운드 법을 고집한 영국도 1970년대 미터법을 수용했다.

미터법의 수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근본 문제는 들랑브르와 매솅의 데이터 자체에 있었다. 자료 제출을 미뤘던 메솅은 측량 자료를 상당 부분 조작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게다가 지구의 모양이 매끈한 타원체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타원체인데 어떻게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을 전 세계에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과 라이베리아, 미얀마 뿐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1999년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터무니없는 손실을 경험했다.

1999년 화성 기후탐사 위성의 실종사건을 겪은 미국인들이 진상을 조사한 결과 미항공우주국(NASA)의 한 기술진은 미국의 전통도량법을 사용한 반면 다른 기술진은 미터법을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 이 차이 탓에 궤도 오차가 90㎞ 나 생겼고 1억2천500만 달러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임재서 옮김. 600쪽. 2만5천원.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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