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그리고 3월의 생각들
현존 그리고 3월의 생각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봄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으면서 땅속 깊숙이 잠재된 그 어떤 신비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하여 조춘(早春)! 어떠한가.

어느 한적한 시간이다. 나는 부인과 함께 신제주 신시가지에 접근되어 있는 한라수목원을 걷고 있었다. 반갑게 다가선 것은 한겨울을 갓 넘긴 매화 그리고 그 향기였다.

어느 시인의 시 ‘매화’가 머리를 스친다.
“잔설은 계곡을 붙잡는 속아리가 있다./봄을 부르면 더욱 선잠을 뜯는 서툰 몸짓/한둘씩 가슴을 열면 단장한 저 눈매들/너는 높은 데도 낮은 데도 없어 봉긋한 웃음으로 그 고고한 옷고름을 풀어 보게나/이 사람아 시원스럽게 옷고름을 풀게나”

자연을 대비시켜 인간사의 속정을 그대로 음미하려는 것이리라. 요즘의 사회처럼 냉랭한 계곡을 붙잡는 고통과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바로 매화의 옷고름을 통해서 그렇게 기다리던 봄을 성큼 다가서게 만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열게 한 것이다.

자연은 참 위대한 것이다. 3월은 이렇게 미물들까지도 때를 만났다 하여 한겨울 내내 움츠렸던 기지개를 힘껏 켜는 계절이 된 것이다. 3월의 생각들이다. 어떻게 보면 추한 것들을 휙휙 벗어 던지고 새롭게 태어난 카알라일의 ‘옷의 철학’도 될 수 있고,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적 관계로 연명하려는 탄타로스의 ‘이원성의 원리’가 또한 그것이 될 수 있고, 아니면 세월을 타면서 삶과 죽음의 강물을 오가는 늙은 뱃사공 카론을 지켜보기도 할 것이다.

한없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그렇게도 작아 보이는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일생을 마무리하는 그것이 바로 인생일 것이다. 결국 인간은 숙명이라는 화살과 운명이라는 화살 사이에서 갈등이나 두려움 그 자체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그저 가련하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권세와 명예를 위하여 투기하고 질시하면서 살아간다. 기회와 물욕만을 위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흥분, 욕정, 사기, 분노, 고통, 좌절, 자살….

‘노아의 홍수’는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일까. 사이비 모랄과 표리관계, 이 모든 것들 역시 바로 불가사의한 생각들이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순수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사악함때문에 현존의 3월 정서를 저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르시스는 에코의 사랑에 응하지 않는 상태에서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제 모습에 도취한 듯 바라보다가 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그 혼이 바로 수선화가 되었다는 신화인데 순결함이 오염으로 변질될까 그래서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다. 메아리는 산에 살지만 숨비소리는 바다에 산다.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소리들, 고향을 찾을 때마다 언제나 와 닿는 3월의 소리들인 것이다. 개나리도 목련도 함께 하면서 이 3월을 지키고 있다.

이제 이 3월도 다 지나가고 있다. 이 3월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제반 의혹은 빈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요, 불확실성의 본령은 사회적으로 불안심리만을 조장한다는 현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악제로 나타나 인간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교육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정치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다른 것이다. 그렇지 못하여 오해도 의혹도 미움까지 아픔으로 나타난다. 이 3월을 멍들게 하고 있다. 자신을 발견하는 달이어야 할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