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가장 위험한 여성' vs '성녀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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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애덤스 자서전 '헐하우스에서 20년'

"나는 아버지께 코딱지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에 왜 사람들이 사느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난 나는 이 다음에 커서 커다란 집을 짓겠다고 결심했다. 그것도 게딱지 같은 초라한 집이 몰려 있는 곳 한가운데 짓겠다고 생각했다."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제인 애덤스(1860-1935)는 1889년 시카고의 대표적인 빈민 지역인 사우스홀스테드가 800번지의 낡은 주택에 빈민 구제를 위한 '인보관'을 세우고 아동 노동 폐지와 노동시간ㆍ여성 노동 조건 법제화, 청소년 관련 법률 개혁 등을 이끌어낸 사회운동가다.

그는 1910년 내놓은 자서전 '헐하우스에서 20년'(지식의숲 펴냄)에서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단편적으로 풀어 놓았다.

어릴적 앓았던 척추결핵으로 안짱다리에 곱사등을 갖게 된 자신의 모습이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 일부러 아버지와 떨어져 걸었다는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애덤스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준다.

애덤스의 아버지는 공화당 상원의원이었고, 애덤스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링컨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록퍼드 여자 신학교를 다니던 때까지는 부유한 가정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지만 1881년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위기가 닥쳤다.

애덤스의 인생을 바꾼 것은 건강문제로 의대를 그만두고 떠난 유럽여행이다. 그는 영국의 사회복지기관인 토인비홀을 보고 '미국식 토인비홀을 세우겠다'는 새로운 꿈을 만들었고, 그대로 실천했다.

북아메리카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헐하우스'는 그렇게 탄생했고, 애덤스는 남녀평등 사상과 평화주의를 토대로 여러 사회 운동을 펼쳐나갔다.

정부는 그녀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낙인 찍었으나, 추종자들은 그녀를 '성녀 제인'이라고 불렀다. 애덤스는 193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건강 악화로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이 중심이 된 개인사에 대한 짧은 회고에 이어지는 것은 헐하우스의 사업 활동이다.

애덤스는 "많은 일을 경험하다보면 사람은 연관성 있는 여러 사건과 체험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내 개인적 이력과 헐하우스의 이력을 따로 분리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심재관 옮김. 288쪽. 1만원.(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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