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유마거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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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촛불로 뜨거운 6월이다. 거리로 내려온 별무리처럼 총총 빛나는 불꽃을 따라, 어느 가난한 병자를 떠올린다. 그의 이름은 유마다.

작년 여름 인도를 떠돌 기회가 있어 바이샬리란 도시에 들렀다. 흙탕물 속을 헤엄치는 물소 곁에서 일분을, 한 시간을, 한 나절을 흘려 보냈다. 홍수 탓에 길이 끊긴 저 건너 마을이 바로 내가 꼭 방문하고 싶었던 참 맑은 영혼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유마다.

1980년대 유마는, 종교적 색채와 무관하게,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민중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마경> 곳곳에 보살의 대비심(大悲心)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뜨거웠다. “자식이 병들면 부모도 병들고 자식이 나으면 부모도 낫습니다. 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중생을 마치 외아들처럼 사랑합니다.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들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유마의 목소리는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에서 놀라운 사랑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같은 병을 앓고 싶다는 말보다 더 가슴 절절한 말이 있을까. 같이 ‘죽는’ 일은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같이 ‘앓는’ 일은 서로를 품고 이해하는 제법 긴 ‘동안’이다. 그의 병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에 감내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리. 흔히 사랑 이야기에 질병이 동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병이 결핵이든 암이든, 사랑 이야기에는 궁극적으로 함께 아파하고픈 갈망과 더 이상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절망이 교차한다.

‘늙어가는 아내에게’를 읽은 후,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을 펼쳐드는 것도 이 도저한 은유에 매혹된 탓이다.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 놓았는지 모르잖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질병일지라도, 사랑하는 이로부터 나왔고, 하여 그와 함께 앓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 이보다 더 정직한 사랑의 자세를 나는 알지 못한다.

2008년 6월, 대한민국의 화두는 ‘소통’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법을 이야기했고 관례를 거론했고 논리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런 말들의 잔칫상은 지루하고 식상하다. 소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국민과 같은 자세로 국민과 같은 병에 걸려 잠시라도 앓아보기를 권한다. 그 아픔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말도 헛것이며 소통은 불가능하다.

정부 대표단이 미국에 가서 추가 협상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촛불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할 만큼 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계속 더 목소리를 높이자는 주장도 있다.

과연 정부는 이 난제를 어찌 풀어야 할까. 지금이야말로 유마거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는 중생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먼저 살피고, 중생을 그 지위나 능력의 단면에 따라 미리 예측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도(大道)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작은 길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햇빛을 저 반딧불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큰 바다를 소 발자국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사자후를 들짐승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취급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집회의 사소한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늘 기쁘게 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바로 그 크나 ‘큰 기쁨(大喜)’을 추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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