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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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일·수필가>

2008년의 우리 화두는 ‘촛불’로 집약된다. 한국에는 지금 촛불 뿐인 듯하다. 촛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형국이다. 촛불 때문에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도 없다.

‘당신들도 조용하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침착하게 빛의 일을 하고 있는 경쾌한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 쉬어 보라’.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가스똥 바슐라르(1884~1962)가 그의 저서 ‘촛불의 미학’에서 한 말이다. 촛불이 방안에 켜지는 순간, 촛불이 놓인 자리는 우주와 사색의 중심점이 된다. 촛불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바라보도록 강요하고 있다. 촛불을 함께 응시함으로써 우리는 이 순간 한 공간에 있음을 인식한다.

“창조에 있어서 ‘삶’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모든 형태, 모든 존재를 통하여 오직 하나의 동일한 정신, 즉 유일한 불꽃이다.” 바슐라르는 촛불을 보면서 몽상과 철학과 존재의 미학을 탐구했다. 촛불은 아픈 사람을 간호한다든가, 누가 죽었을 때 추모하기 위해 밝혔다. 제의에서도 촛불은 사용된다. 초를 태워 빛을 만드는 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며 집중력과 정신의 심지에서 촛불이 되어 타오르는 걸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촛불은 어느새 제의적이거나 미학적인 의미를 벗어나 항의, 저항, 농성의 시위행위로 바뀌었다. 큰 사건 때마다 촛불을 들고 모이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촛불문화나 촛불 정치라는 말이 등장하고, 이제 이러한 집단행동이 당화되고 미화되고 있다. 무슨 일에나 촛불만 들고 나가면 정당하고 의미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현실이 놀랍다. 이 촛불행사는 ‘촛불시위’ 또는 ‘촛불집회’라고 하다가 이제는 ‘촛불문화(제)’ ‘촛불정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바람에 꺼질듯 가냘프고 여린 의미의 촛불이 한국에서 시위나 저항, 공격 등의 거친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은 한국인들의 강한 집단저항 성향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여 촛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많겠지만,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촛불시위의 소득으로는 미국과 추가협상의 길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켤 것인가?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촛불은 이제 바람에 꺼질 듯한 약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할 듯한 거센 파도로 밀려들고 있다. 촛불집회라는 군중심리 속에는 개개인의 정체가 가려지게 되는 익명성이 도사리고 있다. 신속성과 보편성에 익명성이 곁들여진 인터넷이 한국인의 집단 쏠림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본다.

촛불 앞에 국회도 없고 정치도 없다. 중재도 조절도 없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적마다 성명서와 입장을 밝히던 사회단체와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타오르는 촛불의 군중심리에 자신이 탈까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리 사회는 전진을 멈추고 방황과 혼동의 회오리 속에 빠져있다.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과 방안을 내놓기 위해 정치권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한다. 지금은 각계각층이 앞서서 지혜의 촛불을 켜야 할 때다. 촛불의 군중심리에 눈치만 보지 말고 중의를 모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촛불집회는 소통의식의 일면이 있다. 인터넷상으로만 소통하던 행위에서 오는 체감적인 면의 부족감을 촛불집회를 통해 보충하고 확인하는 심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지금 촛불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켤 것인가? 끌 것인가? 촛불에 가려져 있는 민생과 경제의 표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 분야에서 성찰과 반성 속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찾는 논의가 절실하며, 상생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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