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에서 생각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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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 명지대 교수>



등산로 입구엔 ‘보리밥집’이 꼭 있다. 손님들은 주로 장년과 노년층이다. 그들은 보리밥이 꼭 좋아서 먹으러 온다기보다 보통 추억을 좇아서 보리밥집에 온다. 절대빈곤의 시절 눈물로 비벼먹던 보리밥에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위로 누나들만 네 분이었다.

어린시절, 어머니는 겉보리를 안친 무쇠 솥 한가운데 쌀을 한줌이나 될까 말까 하게 얹고 밥을 해서 쌀 쪽만 푹 퍼내어 내 밥그릇에 담았다. 당연히 누나들은 모두 보리곱삶이 밥을 먹었고 나는 보리가 섞인 쌀밥을 먹었다. 한 번은 불만에 가득한 막내누나가 자신의 밥을 잿간에 내다버린 적도 있었다. 막내누나로선 억울한 분풀이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리곱삶이래도, 복터진 줄 알아야지!”

어머니는 종주먹을 들이대며 말하곤 했다. 방귀 한두 번 뀌고 나면 뱃속이 툭툭 가라앉고 마는 게 보리밥이었다. 그러나 보리밥조차 배불리 못 먹을 땐 보릿가루나 밀가루 등으로 풀떼기를 쑤어먹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맹물이나 마시며 끼니를 그냥 걸렀다. 어머니 젊었을 때는 왜인들이 거름으로 실어온 상한 깻묵으로 죽을 끓여먹기도 했다고 했다.

절대빈곤의 상처들

나는 보리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나들한테 뒤통수를 쥐어 박히면서 쌀 섞인 보리밥을 먹고 컸지만, 어쨌든 보리밥은 여러모로 내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식량폭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카메룬에선 식량문제에 따른 폭동으로 수십 명이 죽었고 아이티 역시 사람이 죽고 총리까지 해임됐다. 식량폭동은 중남미와 아랍지역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까지 도미노처럼 나날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름값이 치솟는데 따라 식량 값은 더욱 더 오를 것이다. 식량 생산비의 90% 이상이 석유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트랙터 운행은 물론이고 농약과 비료생산, 수확과 운송 저장 등 모든 생산과 유통과정에 기름이 필요하다. 오일쇼크는 보나마나 식량쇼크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더구나 석유고갈에 대비해서 곡물을 발효시켜 자동차 등에 연료첨가제로 사용하는 마이오에탄올 개발에 선진국들은 이미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 곡물생산량의 40%를 선진국에서 가축들에게 이미 먹이고 있는 참인데, 이제 자동차가 사람이 먹어야 할 식량을 먹어치우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단기고수익을 목표로 움직이는 국제투기 자본들이 석유와 함께 식량이라는 먹잇감을 쫓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맹렬히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 먹거리의 70% 이상은 이미 우리가 생산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 치면, 식량생산에 천문학적 돈을 들이는 것보다 수출을 늘려 그 남은 이익으로 식량을 사다먹는 게 수지맞는 장사로 보인다. 지금까지 역대정권이 밀고나온 정책방향도 이런 계산속을 전제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국과의 FTA도 농업에선 좀 손해 볼망정 자동차 등을 팔아먹는데 유리하도록 정부가 머리를 많이 썼을 것이다.

식량주권의 안전한 확보는

그러나, 만약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징후는 충분하다. 전문가들조차 머지않아 식량이 무기가 되는 시대가 온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우리보다 앞서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나 중남미, 한때 식량수출국이었던 필리핀, 인도 등의 예를 보라. 그들의 농업기반은 최근 십여 년 사이 완전히 몰락하다시피 했고, 그 결과 강대국의 식민지배 상태를 자동적으로 불러왔다.

‘보리밥’과 ‘풀떼기’의 상처는 모두 아문 것이 아니다. 쇠고기문제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할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검역주권’이 아니라 ‘식량주권’이다. 죽어도, 다시 ‘보리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안전한’ 먹거리의 계속적인 보장이고 문화적인 식탁이다. ‘식량주권’을 튼튼히 확보하는 길을 하루빨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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