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나무 밑이 텅텅 비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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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남도 쪽 마을을 지나다 보면 마을 앞에는 여지없이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정자나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 정자를 짓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을 앞에 있는 정자나무는 마을의 앞을 지켜주고 마을 뒤에 있는 느티나무는 마을의 뒤를 지켜 준다. 마을 앞 들 가운데에도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 나무는 들을 지켜 주는 나무다. 마을과 마을의 경계나 산마루에도 느티나무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마을 앞 허전한 곳에 이 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기도 했고, 마을 강가에 심어 강물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준다. 작고 조촐하고 가난한 마을의 뒤나 앞에 심어진 느티나무는 수령이 오래 가고 또 모양이 풍성해 보여서 봄여름 가을 겨울 마을을 풍요롭게 가꾸어주기도 한다. 정자나무라고 하고 당산나무라고도 하는 이 나무의 종류는 대개 느티나무, 팽나무, 또는 서나무가 많다. 어떤 마을은 소나무나 참나무로 정자나무나 당산 나무를 삼은 마을도 있다.



마을을 지켜준 정자나무



우리 마을에는 네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마을 앞 강 언덕에 심어 가꾼 이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라고 부른다. 이 정자나무는 한 15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평생을 홀로 사셨던 서춘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여름이 되면 마을의 모든 남자들은 점심을 먹고 다 이 나무 아래로 모여 들었다.

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그늘이 넓고 짙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이 나무 아래 들면 바람이 일고 땀이 개었다. 나무 아래는 넓적한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서 사람들이 편히 누워 낮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을 자지 않은 사람들은 짚신을 삼기도 했고, 장기를 두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래를 가지고 놀기도 했고, 고누를 두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마을의 일로 대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오랜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 입줄에 오르내린 후 이 나무 아래에서 또 해결이 되었다.

비유하기가 좀 ‘거시기’ 하지만 이 나무는 마을의 ‘국회의사당’이었다. 우리 마을의 모든 역사를, 우리 마을 사람들의 모든 비리를 다 알고 있을 이 나무 아래서는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나무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농촌공동체



우리 마을에 순창 양반이라고 부르는 분이 살았었다. 얼굴이 하얗고 걸음걸이가 무척 조심스러운 분이셨다. 정자나무에서 우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이 다 잠이 들어도 이 분은 늘 앉는 나무 가양자리 그 자리 그 그늘 아래 앉아 맑은 강물과 앞산을 무심히 바라보며 시조를 하셨다. 청사안이이이이이이이, 으으으으으으, 이이이이이, 아아아아아아, 하시다가 한음을 낮추거나 높여 또 으으으으으으, 아아아아아아, 이이이이이 하셨다. 내가 듣기에는 참으로 지루한 아아나, 으으나, 이이이였다. 그 어른의 노래가 너무 단조롭고 지루했던 내가 어느 날 시조를 듣고 있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근데요, 할아버지 왜 맨 날 청산만 하세요?” 그랬더니, 그 어른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시끄럽다. 이놈아!” 하시고 또 그 ‘청산이이아아아으으으’ 였다. 눈이 맑으신 분이셨다. 홀로 깨어 앉아 그렇게 청산을 찾다가 그 어른은 햇살 속으로 가만가만 걸어가 강변에서 소똥을 주워 바제기 가득 담아 짊어지고 집으로 가셨다.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이사를 갈 때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까지 나와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을 눈물로 배웅을 했다. 마을 정자나무에서 친구들이 사라지고 이웃들의 자리가 비어가는 것을 나는 끝까지 보고 살았다. 한 여름이 되어도 정자나무 그늘 아래 사람이 없어 작은 느티나무 싹들이 자라났다. 그 작은 나무를 나는 지금 강 건너 우리 밭에 심어 가꾸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놀던 그 시끄럽고 무덥던 여름날의 정자나무 밑이 텅텅 비고, 지금은 매미들만 무성한 정자 나뭇잎 속에서 귀가 따갑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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