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의 보도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지마는 후자의 경우에는 실상을 취재하는 용기와 진실을 보도하겠다는 진실성이 더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용기와 진실성 때문에 취재기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현장에서 취재한다. 그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언어를 신뢰하게 한다.
말은 근원적으로 정치성을 갖고 있다. 말을 통해 생각과 정보가 소통됨으로써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는 말을 잘했는데, 그 ‘말을 잘함’은 진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진실이 없는 말은 소통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설사 소통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힘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면에 진실의 언어는 전해질 수 있는 환경이 험난하다 하더라도 생명력이 강해 멀리, 그리고 오래오래 전해진다.
삼국유사 신이(神異)편에는 신라 48대 경문대왕의 ‘귀가 큰 이야기’가 있다. 왕의 이발사는 왕의 귀가 크다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가 죽음 직전에 발설한다. 그는 세상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이 사건은 신하로서 발설하지 말아야 했으나 그것이 진실이었기에 전했다. 왕의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세상 사람들의 취향에 영합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진실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실성은 생명력을 지녀 이야기를 전하게 만들었다. 진실의 언어는 창조의 능력을 낳아 인간의 존립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언어는 무서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힘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현실에서 이 언어의 진실성이 실종되기 시작했다. 언어가 훼손되는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무감각하고, 약삭빠른 정치인들은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이버 공간의 언어가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익명화가 강화됨으로써 공유성이 극대화되고, 경로가 다양해짐으로써 자유스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유성과 자유스러움은 투철하고 정직한 언어의식을 통해 정제돼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 면에 취약하다. 더구나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일부에서는 정략적으로 그 공유성과 자유성이라는 표면적인 가치만을 내세워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지난해 대선 때만 해도 네티즌들이 대통령 당선에 큰 몫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급기야는 총리와 각료 임명에도 네티즌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네티즌 정치시대가 됐다고 한다. 이렇게 사이버 공간의 언어가 큰 힘을 행사하면서 해프닝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여당 의원에 대한 살생부(殺生簿) 사건과 촛불시위는 대표적이다. 결과는 전자는 부정적이고 후자는 긍정적이라고 한다. 한 네티즌이 정치가의 정치생명을 쥐어 흔드는 살생부를 작성해 사이버 공간에 퍼뜨려놓았다.
그것이 결국 한 네티즌의 소행으로 나타났으나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무섭다. 촛불시위가 민족의 자존심과 잘못된 한.미관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하더라도 민심을 그러한 방법으로 쉽게 조종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비단 사이버 공간의 언어만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폭로 언어의 피해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지난 대선을 전후한 김대업의 병풍사건도 그렇다. 사기 전과자로 감옥에 있는 피의자의 언어가 정국을 흔들어놓았다. 여야 대권 후보와 그 소속 정당들의 그의 입만을 쳐다보았다.
그는 얼마나 신났겠으며 한국 사회의 취약함을 얕보았을까? 그 언어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이 났으나, 그 언어의 피해는 우리 역사를 바꿔놓았다. 요즈음 집권세력들간에 오고가는 언어가 세련되지 못하다고 한다. 그 세련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다.
언어가 정략적으로 흘러간다면, 언젠가 그 언어가 그 언어를 행사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신뢰성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부패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진실한 언어를 행사할 수 있는 용기와 정직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곧 정치의 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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