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 보고- ⓛ 제주4·3사건의 역사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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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에 의한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

55년간 은폐되고 왜곡됐던 제주4.3사건의 실체와 진상이 어느 정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된 지 3년2개월 보름여 만인 29일 고건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4.3위원회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붉은 색으로 덧칠된 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제주4.3사건은 정부차원에서 국가 공권력의 잘못된 사용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인권이 침해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사실상 규정됐다.

이에 따라 정부 차원에서 규명된 제주4.3사건의 진상에 따라 그동안 ‘공산폭동’으로 규정됐던 제주4.3사건의 역사적 재평가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4.3사건 피해자의 명예회복도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제주도민사회에 서리 서리 맺힌 한으로 남겨졌던 4.3이 이제는 잘못된 국가 공권력의 역할을 바로잡고 한국현대사에 오명으로 남아 있던 수많은 국가권력에 의한 대표적인 인권침해사례로 기록되면서 역사의 교훈으로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

이에 제주일보는 정부 차원에서 규명된 ‘제주4.3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를 20여 회에 걸쳐 기획 연재함으로써 4.3사건의 원인과 배경, 4.3사건의 전개과정, 4.3의 피해상황을 정리한다.【편집자 주】

<1>제주4.3사건의 역사적 성격
제주4.3사건은 진상조사결과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자 과오의 대표적 사건으로 규정됐다.

1948년 제주섬에서는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됐고, 국가공권력에 의해 민간인들이 살상됐음을 진상조사보고서는 분명히 했다.
특히 군경토벌대가 재판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라는 것이다.

이는 1948년 제정된 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과 전시에서도 민간인에 대해 고의적인 살인, 고문 등 비인간적 행위, 고의적 괴롭힘이나 신체 상해, 군사적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 파괴와 약탈 등을 금하고 모든 재판상의 보장을 부여하는, 재판에 의하지 않은 판결 및 형의 집행을 인정하지 않는 제네바협정을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위배한 범죄인 셈이다.

이 때문에 4.3위원회는 결론적으로 제주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였으며 바로 이점이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을 50여 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이 됐다고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 4.3위원회는 제주4.3사건에 대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단독선거.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7년7개월간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미군정하에 있었던 1947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염원하며 개최된 집회와 시위를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 경찰(일제경찰에서 군정경찰로 변신한 경찰)의 발포에 의해 희생된 것이 제주4.3사건을 촉발했다는 점이다.

이후 이에 저항하는 도민들에게 강경대응한 미군정과 다른 지방 사람으로 대부분 교체된 제주 현지 경찰수뇌부에 의해 제주민심은 악화일로에 있었고, 이 같은 민심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용해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으로 연결하면서 4.3사건이 발생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4.3위원회는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는 주장의 근거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분명한 잘못으로 규정했다.

아울러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했으며 4.3사건 전 기간에 걸쳐 무장대 세력은 500명선을 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주4.3사건은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고 제주도에 계엄령까지 선포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국면으로 전환, 도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이 채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4.3사건의 비극인 중산간마을의 초토화, 마을 주민의 집단학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된 그 부모.형제.자매에 자행된 대살(代殺), 백조일손으로 대표되는 예비검속자의 집단학살, 전국 각지에 흩어진 형무소에 수용된 4.3사건연루자에 대한 즉결처형도 모두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들이다.

4.3위원회는 현재 정부에 피해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4028명이나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수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이 수를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으며 잠정적으로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어 실제 피해자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번에 규명된 4.3사건의 진상은 그 실체를 전부 드러낸 것이 아닌 실체 규명을 위한 시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같은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비극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과 국가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당한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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