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상 보고 - 도내 4·3 연구기관·단체는
4·3진상 보고 - 도내 4·3 연구기관·단체는
  • 양진웅
  • 승인 200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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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역사 지키기 위해
편견과 질시 속 진실 밝히기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기까지는 4.3사건희생자유족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의 4.3의 진실과 올바른 역사를 지켜내려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반세기 동안 이념적 누명을 쓴 채 불명예와 편견, 질시 속에서도 4.3의 진실을 알리고 4.3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끊임없는 싸움을 해왔다.

▲4·3특별법 이론적 틀 마련한 ㈔제주4·3연구소
1989년 개소한 ㈔제주4.3연구소(소장 강창일)는 15년간 제주공동체를 완전히 폐허로 만든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의 시작과 정점에서 연구와 실천운동의 중심에 서왔다.

음산한 권위주의 철권정치하에서 4.3의 역사적 진실과 도민의 명예회복, 그리고 이를 통한 민주사회 건설과 민족통일의 기여가 당시 연구소의 활동 목표였다.

그 후 15년간 각고의 연구활동과 실천 노력은 바람직한 4.3유족회의 결성과 통합을 비롯해 4.3특별법 제정과 4.3진상조사보고서 확정의 이론적 틀을 만들어냈다.

‘증언채록집’, ‘4.3유적지 발굴’, ‘4.3연구서’, ‘미군정보고서’와 ‘미군정연구’, ‘4.3 인물찾기’, ‘수형인증언채록’, ‘국내.외 연대사업’ 등 4.3과 관련된 일이라면 모두 연구대상으로 삼아 20권의 단행본과 각종 자료집을 발간해 왔다.

이외에도 4.3 기행과 국제 학술대회 등 크고 작은 세미나를 통해 4.3을 이슈로 부각시키며 4.3 운동의 현단계를 점검하고 과제를 제시해왔다.

특히 1992년 4월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에서 희생자 유골 11구를 발굴해 4.3진상규명에 획기적인 단초를 마련했으며 1994년 3월 애월읍 발이오름에서 4.3 피해 유골 1구를 추가로 발굴하기도 했다.

또한 4.3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일간지였던 제주신보(1947년 1~1948년 4월분)를 찾아 영인본으로 출간했으며 1947년에 작성된 남로당 문건을 발굴.공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400회의 4.3역사기행을 통해 4.3의 진실을 국내외 3만여 명에게 알리는 ‘4.3 홍보’ 역할은 물론 2002년 월드컵기간에는 유럽,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외신에 제주 4.3을 알리는 데 심혈을 쏟았다.

그 밖에도 1989년 처음으로 도내 11개 시민사회단체와 공동으로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 제41주기 4.3추모제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현재의 범도민 4.3위령제의 밑돌을 놓았다.

▲반세기 희생자 넋 달래 온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현재의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회장 이성찬.이하 4.3 유족회)는 1988년 결성된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와 2000년 3월 창립한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가 2001년 3월 하나로 합쳐지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그간 4.3 위령제와 행방불명인 진혼제를 비롯해 육지형무소 순례, 대전 골령골 위령제 등을 벌이며 반세기 동안 설자리를 찾지 못한 4.3 영령들을 위무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왔다.

2년 전부터는 4.3 유골들이 묻혀 있는 대전 골령골 지역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그 곳의 시민단체와 연대해 골령골에 방치된 건축물 철거와 유적 보전을 위한 부지 매입을 촉구하는 등 대외 사업에도 나섰다.

또한 쓰시마섬에 잠든 제주4.3 수장(水葬) 희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두 차례나 현해탄을 건너가 현장에서 위혼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도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일본4.3유족회(회장 강실)와 재경4.3유족회(회장 강종호)도 다시는 비극의 역사가 후손들에게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4.3의 올바른 실상을 현지에서 알리고 있다.

▲공공기관으로서 첫 4·3 기구인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제주도의회에서 4.3에 대한 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은 1991년 제4대 도의회가 구성된 후 첫 정기회 때였다.

이후 ‘4.3관계기구 설치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1993년 3월 4.3특별위원회(당시 위원장 김영훈)가 탄생해 공공기관에서 처음으로 4.3 기구가 설치됐다.

당시 비극의 역사에 대한 진실 찾기와 바른 역사 정립, 도민의 명예회복이라는 목적을 내건 4.3특위는 우선 ‘4.3피해신고실’을 설치해 4.3에 대한 공식적인 기초자료 조사의 터를 닦아 나갔다.

이는 1995년 5월 ‘4.3피해조사보고서’(1차)의 간행으로 4.3 연구에 대한 중요한 사료 구축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1993년 대만 현지를 방문, ‘2.28사건’에 대한 법적 해결 사례를 직접 배워온 후 제165회 정기국회가 열린 그 해 11월 3일 국회내 4.3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는 이듬해 변정일 국회의원이 여.야 75명의 서명으로 ‘제주도4.3사건진상규명특별위원회 결의안’을 국회로 제출했으며, 1996년 도의회 4.3특위는 국회내 4.3특위 구성을 촉구하는 두 번째 청원을 내고 1997년 국회를 직접 방문하는 등 수위를 높여 나갔다.

이 가운데 국회도서관, 내무부 자료실, 정부기록문서보존소 등 4.3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1997년 2월‘제주4.3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보완해 2차 수정판을 펴내고 이후 ‘제주4.3자료집-미군정보고서’를 발간했다.

결국 1999년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4.3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공포되면서 4.3특위는 정부 차원의 4.3 전담기구가 생겨나는 데 한몫을 했다.

하지만 특별법 제정 이후 4.3특위의 미약한 활동은 4.3관련 단체들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4.3특별위원회(현 위원장 강원철)는 초심으로 돌아가 4.3진상조사보고서 채택 이후 후속조치를 위해 제 몫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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