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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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유배돼 제주시 남문로 부근에서 살다가 죽은 조선 15대 왕 광해군(光海君)은 잔인무도한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명석한 군주였다.

1619년 명(明)나라가 후금(後金)과 전쟁에서 파병(派兵)을 요구해 왔을 때 일화는 그의 지모를 잘 말해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일을 상기시키면서 파병을 재촉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병여부를 놓고 조선 조야의 논의가 시끄러워졌다.
광해군은 고심 끝에 마침내 파병을 결정했다.

강홍립(姜弘立) 대원수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해 1만3000여 명의 병력을 요동땅 전장터로 보내, 조.명(朝明)연합군을 이루게 했다.

그런데 강홍립은 동가강을 따라 연합군과 함께 진격하다가 부차(富車)에서 첫 싸움을 벌인 후 훗날 청(淸)나라가 된 후금군대에 투항해 버렸다.

강홍립이 전 병력과 함께 투항해오자, 훗날 청나라 태조가 된 누루하치가 무척 기뻐했다.

누루하치는 “조선군의 출병은 부득이하였다”는 강홍립의 말도 들었다.
이 투항의 배경에는 파병전야에 광해군과 강홍립이 나눈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외국에 파병하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비밀리 당부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한족과 청나라 여진족의 싸움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하며 고민한 조선군주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강홍립이 투항했을 때 모두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과 강홍립의 깊은 뜻을 몰랐던 조선군의 부장(副長)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투항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 외롭게 전사했다.

지금도 중국 요동땅 부차 옛 싸움터에 가면 장군버들(將軍柳)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은 김응하 장군이 버드나무 언덕을 방패로 삼아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자리다.

조선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이곳은 조선의 선비들이 꼭 들러 그를 기리며 눈물을 흘렸던 곳이기도 하다.

강홍립은 청나라가 세워진 후 고국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전사한 김응하를 높이 추모하는 대신 항복한 그를 몹시 멸시했다.

1627년 강홍립은 외롭게 숨졌다.
그때 그에게 밀명을 내렸던 광해군은 폐위되어 유배되어 있었다.
강홍립이 죽은 지 14년 후인 1641년 어느 날 광해군도 제주시내 남문로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숨졌다.

이라크전 파병을 놓고 국론이 갈라지면서 우리 사회가 두 쪽이 되어 서로 매우 민감하게 충돌하고 있다.

광해군과 강홍립, 명나라, 청나라가 생각나고 그 위에 미국, 이라크가 오버랩되는 4월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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