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스가 본 한반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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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원인은 순전히 북핵문제라고 무디스 고위 관계자가 재차 강조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경제정책과 한국내 반미감정의 고조, 심지어 SK 글로벌의 회계부정 파문도 국가신용등급 전망 조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토머스 번 무디스 국가신용팀 부사장은 2일 재미상공회의소 초청으로 가진 `국의 2003년 국가신용등급에 대한 무디스의 전망' 강연을 통해 신용등급 전망 하향조정의 배경과 현재 한국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무디스의 시각 등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번 부사장 강연의 핵심은 한국 국가신용의 근간은 매우 튼튼하지만 북한문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장차의 신용등급 조정 가능성을 열어놓는 게기가 됐다는 것이다.

번 부사장은 북한 핵문제가 한국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지만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채권자가 채권을 회수할 수 있느냐'의 시각에서 본다고 밝혔다. 그는 `A3'가 포함된 `A군(群)'의 국가신용등급은 민간기업 IBM이나 다우 케미컬과 비슷한 수준이며 화이자나 월 마트보다는 낮고 AOL 타임워너나 월트 디즈니보다는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 달리 말하면 5년간 채권의 디폴트(지불불능) 가능성이 0.3% 이하에 그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북핵문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한국의 `A3' 신용등급에 어떤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지를 고려한 끝에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는 것이 번 부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에 영향을 끼칠 향후 사태진전으로 북한이나 미국 가운데 어느쪽에서건 `강압적 행동(coercive action)'을 취하는 상황을 들었다. 특히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위협이 있을 경우 "무디스는 국가신용등급위원회를 소집해 사태를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해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즉각 신용등급 하향이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번 부사장은 그러나 "한국의 경제가 강력하고 한미 동맹이 굳건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도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A3'등급에 어울리는 안정성을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번 부사장은 단정적인 언급을 조심했지만 그가 제시한 시나리오는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우선 북핵문제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지속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봤다. 미사일 문제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언급하지 않은 94년 북미 기본합의로 돌아가는 것 역시 신용등급 측면에서는 부정적이다. 북한에 대한 제재나 군사행동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합의의 틀을 위한 협상은 긍정적 사태진전이지만 아직까지 이런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의 양보나 자발적인 개혁도 긍정적으로 평가되겠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결국 시간을 갖고 북한을 설득해 대화의 장으로 유도해낸다는 전략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번 부사장은 "외교적 해결은 가능할 지 몰라도 북한이 도발적인 행동을 계속하는 한 시간은 고갈돼 간다"고 지적했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행정부가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시 영변 핵시설 공격 계획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현재의 북핵문제 역시 시간이 다돼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번 부사장은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의 `햇볕정책'이나 북한의 개혁움직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햇볕정책'이 어느 정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주변적이며 전술적인 것이었을 뿐 전략적 변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북미기본합의 체결, 남북 정상회담, 이산가족 상봉, 유럽연합(EU)의 북한 승인, 북한 응원단의 부산 아시안 게임 참가, 북한의 경제개혁 등 94년 이후 긍정적 사태진전이 있었지만 사실은 이 모두가 후속조치가 미비하거나 내재적 한계를 지닌 것들이었다.

특히 `햇볕정책'은 "북한의 상응하는 조치가 없었고 대북 비밀송금 파문으로 의미가 훼손됐다"고 번 부사장은 평가했다. 번 부사장은 그러나 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대북 비밀송금액 5억달러를 포함하더라도 북한에 식량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건설비용 등으로 지원한 금액이 모두 17억2천200만달러로 국제사회가 같은 기간 지불한 17억8천300만달러보다 많지 않을 뿐더러 "상대적으로 싼 포용비용"이라고 번 부사장은 지적했다. 북한 붕괴에 따른 한국의 `통일 비용'에 대해서도 그는 "한국이 감당못할 수준은 아닐 것으로 본다"면서 "통일비용이 너무나 엄청날 것으로 우려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북한의 붕괴는 막아야 한다는 과거의 통념은 재고돼야 한다"고 밝혔다.

한미 관계에 대해 번 부사장은 "1월까지만 해도 양국관계의 긴장이 두드러졌으나 이제는 인식의 차이가 많이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러나 주한미군의 철수 또는 재배치는 한반도 안보환경 뿐만 아니라 투자자들의 감정과 경제 실적에도 직접 연관될 수 있고 따라서 국가신용의 근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군 철수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일이 고려 요인이 된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반미감정이나 민족주의의 대두에 대해 번 부사장은 결정적인 평가를 유보하면서도 이런 문제가 경제의 개방과 자유화를 후퇴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정부의 정책 역시 "재벌개혁이나 부의 분배 등에 관해 변화가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연속성이 유지될 것"이라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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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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