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 해녀의 딸”…김미애씨의 ‘아름다운 인생 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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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女商 졸업…방직공장 공원…사법고시 합격

아버지 사업 실패로 점원·식당하며 생계 꾸려
20세 대학 입학 6년간 하루 12시간씩 司試 준비
“부모 모두 우도 출신…성산포 쪽빛 바다 못 잊어”


“이제껏 살아오면서 힘든 굴곡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해녀로 힘들게 살아왔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어요.”

“꿈은 꾸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저처럼 힘들게 지낸 아이들을 돕는 청소년 선도가 제 꿈이에요.”

제주 해녀의 딸로 태어나 지난해 말 사법시험에 합격해 현재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늦깎이 법조인 생활을 준비하고 있는 김미애씨(34). 그녀의 특이한 경력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 김두환씨와 어머니 오두리씨의 고향이 모두 북제주군 우도면이고 자신도 제주 여성이라고 소개했다.

“집안이 어려워 고향인 제주를 자주 찾아가지는 못했어요. 외할머니 역시 한평생 해녀생활을 했고 현재 우도에 있는 이모(오갑순씨) 역시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바다를 품고 살고 계세요. 작은 아버지(김두만씨)는 제주시에 살고 계시고요. 친할머니가 성산읍 신산리에 살아 계실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가끔 찾아뵙곤 했어요. 그때 쪽빛 바다와 어우러진 구멍 뚫린 까만 돌, 성산일출봉 앞 바다는 지금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다가와요.”

그녀는 고향 제주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힘들 땐 어머니 떠올려”

인터뷰 과정에서 풀어놓은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억척스럽고 강인한 제주 여성의 모습을 빼닮은 듯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해녀였던 어머니는 어선 사업을 위해 경북 구룡포로 이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집안은 급격히 기울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는 방직공장에 다니며 야간 여상을 졸업했다. 쇼핑센터에서도 일했고 초밥집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했다.

김씨의 이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궁암 말기로 핏기 하나 없이 누워만 계시던 어머니가 기억나요. 중학교 2학년 때였죠.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제주에 대한 그리움을 늘 말씀하셨어요. 따개비다, 군소다, 바다에서 나는 것들을 잡수고 싶다고 찾으셨죠. 전 어른 해녀용 고무장화를 신고 바다로 나가곤 했어요.”

“어머니가 아프다니까 신(神)을 찾게 되더군요. 하소연할 데가 필요했어요. 어머니를 리어카에 싣고 교회로 나갔죠. 아버진 사업에 실패하신 뒤로 별다른 일이 없었어요. ‘명문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포항여고에 입학했는데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죠. 아침마다 동네를 돌며 차비 빌리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1학년때 5월쯤이었는데 반 아이들이 갑자기 저더러 교실 밖에 나가 있으래요. 애들이 ‘불우이웃 돕기’를 위해 걷은 돈을 받는데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게 하셨죠. 제가 그리웠던 건 따뜻한 말 한마디였고, 살가운 관심이었는데.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전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했어요.”

“학교 갈 차비도 없어”

“1학년인 그때가 1985년이었지요. 부산에서 공장에 다니던 친구들이 포항에 올라왔어요. 그애들을 무작정 따라나섰죠. 방직공장에 취직해 허드렛일을 했어요. 하루 8시간 꼬박 일했는데 피곤해서 쓰러질 정도였죠. 밤엔 여상에 다니면서 학업을 이어갔어요. 돈을 좀 모아 15평짜리 초밥집도 냈어요. 주방장도 하고, 주문도 받고, 계산도 하며 1인 3역을 했답니다. 손님들은 ‘나이 어린 아가씨가 고생한다’면서 기특하게 여겼고 단골도 제법 생겼어요. 그런데도 이게 아닌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7세이던 1996년에 대입 수능 공부를 시작했죠. 당시 잠시 방황하면서 잊었던 교회를 다시 찾기 시작했죠. 이듬해 동아대 법대에 입학해 학교 고시실에 들어갔어요. 입실 시험에서 1등을 한 덕분에 학교에서 보조금도 받을 수 있었죠. 그 후로 졸업 때까지 4년동안 장학금을 받게 돼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돈을 만져도 기쁜 적이 없었죠.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으니까요. 전 도서관 창가에 자리를 정해두고 앉았는데요 어느날 창가에 햇살이 비치는데 햇살이 나만 비추는 것 같았어요.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이네요, 사법시험에 매달린 시간이. 하루 12시간 책상에 앉아 있었죠. 정말 즐거웠어요. 부모 잘 만나 줄창 ‘대학 가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전 좋아하는 것 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죠. 2차 공부 땐 있는 돈 죄다 모아 서울에서 학원에 다녔고요. 뭔가 할 때마다 미리 돈 계산을 하는 게 익숙해요. 누군가 알아서 도와주는 행운이 제겐 별로 없었거든요. 1차 시험에 붙고 대학에서 매달 받은 보조금이 42만5000원이었어요. 동아대는 제게 꿈을 열어 준 곳이에요.”

“공부할 땐 정말 즐거워”

그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있고 인터뷰 내내 이를 강조했다. 그녀는 “어릴 적 교회에 다녔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멀리하게 됐다”며 “그러나 다시 하나님 곁으로 다가가면서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했을 때, 수중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손을 뻗쳐준 유일한 ‘친구’가 돼 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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