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과 산지 폐기…허탈한 농심(農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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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은 농업이야말로 순수 시장 경쟁 모형에 가장 가깝다고 말한다. 농산물 생산량이 약간이라도 넘치거나 모자라면 가격이 널뛰듯 출렁거리기 때문이다. 어떤 공산품이나 서비스상품도 농산물처럼 수요·공급의 가격 원리에 충직한 것이 없다.

‘최초의 위대한 경제통계학자’로 불리는 영국의 그레고리 킹(1648~1712)이 발표한 ‘킹의 법칙’에서 갈파한 바와 같이 농산물의 경우 적정 수요량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폭등하고 반면에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 가격이 폭락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농산물은 10% 과잉 생산되면 10%만 값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40∼50%나 값이 급락해 생산한 농업인들은 인건비는 고사하고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고통을 받게 된다.

올해 제주지역 겨울 채소 농사가 풍년(?)을 맞으면서 가격 하락과 판로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제주농협지역본부에 따르면 올해 가을감자 생산량은 지난해에 비해 78%, 양배추는 36%, 브로콜리는 14%, 쪽파는 30%, 당근은 58% 늘어날 것으로 관측됐다.

이 같은 과잉 생산은 전국적인 현상으로 재배 농업인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이달 초 내놓은 ‘채소관측 11월호’에서 배추·무·대파·쪽파의 산지 출하량은 5∼17%, 양배추·감자·당근의 출하 면적은 태풍 피해가 심했던 지난해보다 7∼25%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채소류들이 올해 결과적으로 수급 조절에 실패, 과잉 생산에 이른데는 우선 기대 이상으로 좋은 날씨의 영향이 컸다. 올해 가을 일조량은 풍부한 반면 비가 적고 태풍 피해도 없어 대부분의 농산물이 풍년을 맞았다.

연간 국내 수요가 한정돼 있고 가뜩이나 불황에 소비가 위축된 상황에서 생산만 늘어나니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부와 농협은 특정 농산물이 과잉 생산돼 가격 폭락이 발생할 경우 농가에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보장해주기 위해 불가피하게 산지 폐기를 하고 있다. 산지 폐기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농산물의 가격 지지를 위해 일정 물량을 인위적으로 시장에서 격리시키는 조치라고 보면 된다.

산지 폐기는 가격 등락이 심한 무, 배추, 양파, 마늘, 당근 등 16개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고 최소한의 농가 소득을 지지하기 위해 1995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수급 안정사업의 중요한 정책 수단이다. 남은 물량의 가격 안정을 기대하고 내년 농사를 준비하고자 하는 농업인의 처절한 자구 노력인 것이다.

한 해동안 공들여 키운 농산물이 유통조차 되지 못하고 산지에서 그대로 버려질 경우 농심(農心)은 시퍼렇게 멍들 수 밖에 없다. 농식품부는 지난달 전국 각지에서 1만t의 배를 산지 폐기한 데 이어 김장 배추 10만t을 산지에서 폐기하기 시작했다.

제주의 경우 수출과 군납 등 다각적인 유통대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정부와 행정차원의 산지 폐기는 아직까지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재원자체가 없는 데다 행정 의존과 무임승차 의식, 중간상인만 이익 등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고육지책으로 생산예상량의 20%에 대한 ‘자율 산지 폐기 운동’이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애써 가꾼 농산물을 버려야 하는 농업인의 입장에서 볼 때 최저 보장가격마저 보상되지 않는 자율 폐기는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제주만 할 때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등 자칫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농업인 스스로 생산량 일부를 폐기하지 않으면 원활한 유통처리의 실마리조차 풀리지 않는다는 게 농산물 유통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아무튼 제주특별자치도와 농협, 농업인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 모아할 때이다.<고경업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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