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20년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지만 워런 하딩의 공화당에 패배하고 이듬해에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찬물에 빠져 하반신 불수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입는다. 부인 엘리노어의 헌신적인 노력 하에 절망하지 않고 각고의 재활치료에 진력, 도움이 필요하기는 해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되자 뭇 사람들의 경탄 가운데 정계에 복귀한다.
그리고는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어 대공황이 일어난 후 혁신적인 정책을 시행,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는 데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뉴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 된다. 그는 선거운동기간 중 유능한 지식인들을 모아 ‘브레인 트러스트’를 조직해 정책입안, 기획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1933년 3월에 취임하자, 특별회기인 ‘백일의회’를 소집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잇따른 정책을 실천함으로써 최악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명확하게 체계가 선 정책구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모순된 견해를 가진 인재를 기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오히려 이로 인해 정책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국민의 요구를 파악하는 뛰어난 감각을 갖추게 되어 현실적인 필요에 유연히 대처할 수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노변담화(爐邊談話)”라 불린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정책을 설명하고 신문기자회견의 적극적인 활용 등 여론 조작 면에서도 대중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대공황(大恐慌t he Great Depression)에 대해서는 뉴딜(the New Deal)정책이라고 하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적극적인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 단체 교섭권보장 같은 노동자의 지위향상과 테네시 계곡개발공사(TVA)등 대규모 공공사업에 의한 실업자 대책 및 사회보장 같은 정책을 펴 극복을 시도했으나 좀처럼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의 2차 세계대전 참전에 의한 군수증대 덕분에 미국경제가 회복되자 실업자가 격감했다.
뉴딜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일고 있지만, 굳이 전쟁이 없었어도 성공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는 말한다. “거짓 없이 솔직하게 봅시다. 겁을 내지 말고 현실을 똑바로 보면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뿐 입니다.”
<서봉성 제주산업정보대학 교수·한중교류통역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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