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론]不世出의`大統領`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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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32대 대통령인 루스벨트는 1882년1월30일, 뉴욕 주 북부의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제임스 루스벨트(1828-1900)는 델라웨어 앤드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자 유복한 지주였는데 루스벨트 가는 1650년경에 네델란드에서 뉴암스테르담(뉴욕)으로 이주한 유대인 집안이라 한다. 1788년에 아이작 루스벨트가 미국 헌법제정회의 멤버가 되었는데 이것이 후손인 프랭클린에게 큰 자랑거리였다. 18세기에 루스벨트 가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가(19세기에 민주당 지지자가 됨)와 굴베이 루스벨트가(공화당지지)로 나뉜다. 굴베이의 공화당원인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프랭클린의 12촌(fifth cousin)이 되는 먼 친척이었다. 양가는 정치적인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교를 계속했다. 제임스 루스벨트는 굴베이의 일가 모임에서 아내를 만났는데, 프랭클린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질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의 모친 사라 델라노는 프랑스계로 그녀의 조상은 1621년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펠리페 데라 노이였다. 그의 부친은 그가 출생 시에 이미 모친 나이의 2배인 54세였기에 사라는 외아들인 그의 유년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귀족적이고 부유한 집안의 자제답게 그 또한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지 않고 귀공자로 성장했는데, 거의 매년 가족과 함께 유럽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혔고 부모와 가정교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 또래의 친구와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14세에 사립명문 그라톤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하버드대를 거쳐 콜럼비아대 로스쿨을 마쳤으나 수줍고 비사교적 성격으로 친구가 별로 없었다. 대신 스포츠와 과외활동, 특히 신문반 활동으로 외로움을 달랬는데 자신은 결코 학자타입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는 1920년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지만 워런 하딩의 공화당에 패배하고 이듬해에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찬물에 빠져 하반신 불수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입는다. 부인 엘리노어의 헌신적인 노력 하에 절망하지 않고 각고의 재활치료에 진력, 도움이 필요하기는 해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되자 뭇 사람들의 경탄 가운데 정계에 복귀한다.

그리고는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어 대공황이 일어난 후 혁신적인 정책을 시행,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는 데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뉴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 된다. 그는 선거운동기간 중 유능한 지식인들을 모아 ‘브레인 트러스트’를 조직해 정책입안, 기획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1933년 3월에 취임하자, 특별회기인 ‘백일의회’를 소집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잇따른 정책을 실천함으로써 최악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명확하게 체계가 선 정책구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모순된 견해를 가진 인재를 기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오히려 이로 인해 정책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국민의 요구를 파악하는 뛰어난 감각을 갖추게 되어 현실적인 필요에 유연히 대처할 수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노변담화(爐邊談話)”라 불린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정책을 설명하고 신문기자회견의 적극적인 활용 등 여론 조작 면에서도 대중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대공황(大恐慌t he Great Depression)에 대해서는 뉴딜(the New Deal)정책이라고 하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적극적인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 단체 교섭권보장 같은 노동자의 지위향상과 테네시 계곡개발공사(TVA)등 대규모 공공사업에 의한 실업자 대책 및 사회보장 같은 정책을 펴 극복을 시도했으나 좀처럼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의 2차 세계대전 참전에 의한 군수증대 덕분에 미국경제가 회복되자 실업자가 격감했다.

뉴딜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일고 있지만, 굳이 전쟁이 없었어도 성공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는 말한다. “거짓 없이 솔직하게 봅시다. 겁을 내지 말고 현실을 똑바로 보면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뿐 입니다.”

<서봉성 제주산업정보대학 교수·한중교류통역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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