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진상 보고 - ③ 제주 4·3사건의 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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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경찰 발포 유례없는 민·관 총파업 불러

-1947년 3.1사건과 도민 총파업
신탁과 반탁 논쟁을 폭발시켰던 미.소공동위원회의 한반도문제 처리가 표류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미 군정하 합법적인 정당으로 등록된 남로당은 광복 이후 두번째 맞는 3.1절 기념행사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조직운동으로 전환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좌.우익 인사와 관공서, 단체 대표, 지방 유지를 망라한 ‘제28주년 3.1 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위원장 안세훈)가 구성되고 미 군정당국으로부터 제주북교 집회(시위는 불허)를 허가받았다.

이 집회에만 2만5000~3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됐고 읍.면별로도 별도 행사가 치러진 점을 감안하면 거의 전 도민이 함께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집회 후 참가자들이 행렬을 이뤄 시내로 시위 방향을 잡고 관덕정 앞 경찰서를 지나갈 즈음 기마경관이 탄 말의 말굽에 어린이가 채였는데, 그럼에도 경찰관이 그대로 가려 하자 시위 관람 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기마경찰관을 쫓았고 당황한 기마경찰관은 경찰서쪽으로 말을 몰았는데 그 순간 경찰서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희생자 중에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이 포함돼 있었다. 도립병원의 검시 결과 희생자 1명을 제외하고 전부 등뒤에서 총탄을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이 공포만 쏘아도 군중이 흩어질 수 있었음에도 발포로써 과잉 대응한 것이었다.

더욱이 도립병원 앞에서는 경찰이 피투성이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해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우발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당연히 경찰이 사과를 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하나 경찰은 오히려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고 그날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리며 강공책으로 돌아서 3.1 기념행사를 주도한 간부와 시위 참여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검거함으로써 제주도의 민심을 자극했다.

그 결과 남로당 제주도당은 대책위를 구성하고 대정면당이 건의(김달삼이 주도)한 ‘전도 총파업’으로 맞서게 됐다.

사건 발생 10일 후인 3월 10일 시작된 제주도의 민.관 총파업은 한국에서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관공서와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각급 학교는 물론 미 군정청 통역단 등 공무원과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 등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파업의 요구조건은 3.1 기념행사는 민족 독립 기념과 과거 선배 추모를 위한 평화적 행사였음에도 일제시대에도 없던 평화 군중에 대한 발포는 포악이라고 규정하고 발포 책임자와 발포 경관 처벌, 3.1사건 애국인사 검속 금지, 희생자 및 유족의 생활 보장, 일본 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 소탕 등이었다.

3월 말까지 20여 일간 지속된 제주지역 총파업은 166개 기관.단체 4만여 명이 참여(제주경찰사)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상점 등이 문을 닫아 파업에 동조하는 등 전도민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또 당시 유일한 신문이었던 제주신보는 3.1사건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 모금운동을 전개해 도내외에서 호응을 얻기도 했다.

특히 미 군정 보고서는 “3.1사건 이전까지는 제주섬에서 공산주의자에 부화뇌동해 일어난 소요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고 경찰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 공격적인 섬주민들에 의해 일어났고 4.3을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고 기록했다.

미 군정 중앙조사단이 제주 현지를 방문해 조사까지 했으나 조사 결과에 대해선 함구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미군의 정보보고서는 “총파업이 3.1 경찰의 발포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 것 같으며 남로당이 이러한 증오심을 주민 선동에 이용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보고된 폭력사태는 없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미 군정은 민심 수습보다는 좌익 척결에 주력했고 사후 처리는 경찰 총수였던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3.1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한 조병옥은 도청 직원에게 “제주도 사람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연설을 함으로써 도민과의 대립을 심화시키게 된다.

실제로 그 이후 제주도에는 다른 지방으로부터 경찰병력이 급증해 3.1사건 이후 경찰병력은 2배 이상 늘어 3월 말로 진정국면에 들어선 총파업은 대량 검속의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었다.

파업사건에 연루돼 경찰에 검속된 인원도 4월 10일까지 도청의 고위 관리를 포함해 500명에 달했고 경찰의 취조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돼 이 같은 경찰의 검속을 피해 직장을 이탈하는 사례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광복 이후 제주도로 귀환했던 청년들이 다시 일본으로 나가는 역류현상마저 겹치면서 그 공백을 이북 출신들이 차지, 대정중의 경우 제주 출신 교사보다 다른 지방 출신 교사가 더 많아지는 현상도 빚어졌다.

이 두 사건의 여파로 제주도민들은 서서히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으며 생존권의 위협을 받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3.1사건 및 총파업 결과

3.1사건과 3.10 도민 총파업으로 인해 경찰에 검거된 500명 가운데 군정재판에 송치된 자는 4월 10일 현재 199명, 송치 예정자가 61명으로 260명이었다.

그 이후에도 검속자는 늘어나 실제로 군정재판에 회부된 인원은 328명으로 확대됐으나 실형선고는 52명에 불과했고 52명이 집행유예, 56명이 벌금형으로 풀려났으며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다.

3.1 기념행사를 주도한 제주도민전 공동대표인 현경호는 벌금 5000원, 안세훈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최고 형량은 허두문에게 내려진 징역 1년이었다. 제주북교에서 열린 3.1 기념 집회는 허가받은 집회로 판결됐다.

이 같은 형량은 경찰당국의 강공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또 미 군정은 보고서를 통해 ‘총파업에는 좌익뿐만 아니라 우익쪽에서도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아울러 미 군정 보고서는 “좌.우익에 관계없이 대다수의 주민이 자신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믿을 때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번 파업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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