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교(?)의 영원한 매력 ‘영광의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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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네티즌들 가운데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표현하는 일이 일상화 된지 오래되었다. 이런 표현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렇지만 과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미친개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는데 그런 시각을 교정하여 주려는 시도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폄하한다고 해서 본질이나 형태가 훼손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요즘 인터넷 상에서는 비아냥거림이 허다 하지만 이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자기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함이 옳지 아니한가.

그런데 텔레비전 연기대상, 무슨 상을 받으면서 너나 없이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수상자들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척하면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본래 모든 영광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고 믿는다. 주기도문의 결론도 “나라(통치)와 권능과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영광을 받을 때는 지체 없이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려 드리는 것이다. 영광을 신에게 돌려 드리지 않고 자기가 차고앉아 있는 것은 오만의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고 위험한 일일 뿐 아니라 남의 몫을 가로채는 파렴치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신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면 기뻐하시고 한층 더 승화된 영광으로 형태 변화시켜서 은혜를 내려 주시고, 역동적 순환으로 몇 배로 갚아 주신다고 믿는 믿음 때문에 신에게 영광 돌리기를 지체 할 필요가 사실상 없는 것이다. 내가 사는 목적이 신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라는 고백 속에는 이런 신비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영광을 돌리는 다른 표현은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고, 또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선한 일을 하고도 죽도록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혔다. 억울함과 참담함과 고통의 극치에서도 그들은 신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송하였다.

요셉 또한 그러하였다. 그는 노예로 팔려 가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감사하였다. 이집트 왕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궁중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감사하였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감사의 조건을 열어 주신다는 것이 경전의 약속이다.

탈무드에는 “은혜와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라는 말이 있다.

영광을 돌리는 것은 겸손의 구체적 표현이고, 감사는 겸손함의 증거이다. 진정한 겸손은 영광을 돌리는 기반이며, 감사는 무한 신뢰의 통로이다.

막연히 신을 사랑한다는 관념적 수사에서 뛰쳐나와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성실하고 치열한 삶, 범사에 감사하는 신뢰의 삶, 그 감사는 신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도, 이웃과 가족에 대해서도, 자연과 우주 만상에 대해서도 감동적인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동맥과 정맥의 혈류처럼 역동적인 순환의 감추인 신비 속에 행복에 겨운 삶을 살게 될 것이 아닌가.

회교도들은 알라의 영광을 위하여, 불교도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그도 저도 아니면 조상의 영광을 위하여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인가.

<김영준·제일행복한교회 목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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