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④ 발발 전 검거선풍과 도민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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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검속 광풍’에 휩싸여
1년 새 검속인원 2500명 달해


3.1절 경찰의 발포에 항의해 전개된 도민 총파업 이후 미군정하의 경찰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총파업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리는 강경책을 택함으로써 제주 섬은 대검속의 광풍에 휩쓸려 갔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경찰에 검속된 인원만도 2500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 결과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던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나가는 역류현상이 벌어지는 등 많은 도민들은 생존을 위해 직장과 일터,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도피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도민의 빈자리는 이북 출신을 비롯한 다른 지방 출신들이 차지하면서 제주도민과 다른 지방 출신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화, 확대돼 갔다.

검속자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도민들에 대해 강경진압책을 선택한 경찰에 대한 도민사회의 반감은 널리 퍼져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해졌고 1947년 3월 우도와 중문리사건, 6월 종달리사건, 8월 북촌리사건은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군정은 제주도 군정장관(미국인)과 경찰고문관(미국인), 제주도지사, 경찰감찰청장, 모슬포 경비대 9연대장 등 제주수뇌부 5명을 전부 교체하면서 대도민 강경책을 독려했다.

특히 제주 출신 박경훈 도지사를 전북 출신 유해진 도지사로 교체한 것은 제주지역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던 우익세력의 강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신임 유 지사는 경호용으로 서북청년단원 7명을 데리고 제주로 내려왔으며 각급 관공서의 제주 출신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으로 공백을 이북 출신으로 채워 갔던 것이다.

유 지사는 곡물 수집의 강제 할당을 비롯해 자신의 정치적.사적 견해와 다른 사람들을 전부 좌익분자로 규정하는 극우적인 인사였음이 미군정 보고서에 기록돼 있다.

미군정 보고서에서는 유 지사가 좌파를 지하로 몰고 갔으며 좌익세력과 동조자의 수를 증가시켰다며 재임 중 경찰의 테러행위를 수없이 자행함으로써 제주의 민심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했을 정도다.

이와 함께 1947년은 한반도 문제를 다루던 미국과 소련이 냉전체제로 돌아섬에 따라 한반도 역시 그 영향권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제주도는 그 첫번째 대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은 표면적으로 좌.우익정당 사회단체에 대해 동등한 대우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1947년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실시된 미군정의 전국적인 좌익검거령은 제주사회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 예고탄이었다.

제주도 경찰당국도 8월 14일부터 민전간부와 남로당에 가입했던 공무원 등에 대한 검거에 나서 검거된 인원이 민전의장인 박경훈 전 도지사를 포함해 20여 명에 이르렀다.

이는 박 전 도지사가 3.1사건에 대해 경찰이 잘못했다는 입장을 취해 왔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다 풀리지 않아 도지사직을 사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 전 지사 등은 거의 대부분 풀려났으나 9월 한반도 문제가 미국.소련에서 서방진영국가가 주도하는 유엔으로 넘어가면서 국내와 제주도에서는 우익세력이 급속히 강화되는 등 좌익과 우익 간 첨예한 대립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이를 토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사전정리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광복군 출신 이범석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 이청천을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 제주도조직이 미군정의 비호 속에 조직된 데 이어 극우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 제주도본부가 결성되는 등 세력 확대를 도모해 갔다.

이북 출신자들로 구성된 서청은 미군정 당국의 지원 아래 경찰과 행정기관 교육계에 진출하고 ‘빨갱이 사냥’에 나섰으며 좌익분자를 철퇴한다는 미명 아래 도민들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고 부녀자 겁탈, 폭력행사 등을 해 도민사회의 원성의 대상이 됐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4.3 발발 이전 제주도에 상주한 서청 단원의 수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좌파쪽의 자료에는 760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소개됐다.

더욱이 4.3 발발 직후에는 서청 단원 500명이 경찰전투대 요원으로 추가로 내도하는 등 당시 제주도민사회에서 서청의 세력은 제주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단체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미군 방첩대는 1947년 12월 보고서에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이른 시일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하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또 미군 제주방첩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1948년 1월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우익과 좌익 진영으로 분열돼 있지만 대부분 지식인층인 지도자와 대중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 인사들은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일컫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 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 인사들의 척결을 통해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고 기술돼 있다.

이처럼 미군정 당국은 한반도 문제를 처리하면서 불거지는 제반 문제를 다루고 있었으며 제주도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세세히 분석하고 대응하고 있었음을 자신들의 정보보고서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아울러 제주도민과 경찰, 제주도민과 다른 지방 출신 간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킨 장본인인 유해진 도지사의 임명과 제주 출신 박경훈 전 도지사에 대한 체포와 석방 등에도 미군정은 실질적인 힘을 행사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미군정은 자신들의 정세 분석과 그에 따른 상황대처방식이 상호 모순된 듯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친미정부의 수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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