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⑤ 2·7사건과 고문치사사건
4·3사건 진상보고-⑤ 2·7사건과 고문치사사건
  • 강영진
  • 승인 200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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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選' 총파업 검거선풍…청년 3명 고문 致死 도민 분노

1947년 11월 유엔은 미국이 제출한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동시 총선거 실시 후 국회의 구성과 통일정부 수립을 의결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강행되면서 1948년 벽두부터 남한내 각 정당과 사회단체의 반발이 격화됐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반발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 가세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은 미군정과 보조를 맞추며 단독정부 수립의 길로 나가면서 단정 반대세력과의 일촉즉발의 상황을 예고했다.

결국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 총파업을 단행하는 이른바 ‘2.7구국투쟁’의 길로 나서며 남.북에 상주하는 미군과 소련군의 동시 철퇴,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을 주장했다.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제주도는 2월 7일 당일에는 오히려 조용했으나 8일부터는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정보보고서에는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져 9일부터 11일 사이 3일간 경찰에 체포된 인원만도 29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

전도적으로 검거 선풍이 또다시 불어닥쳐 삼양리 한 마을에서만 주민 94명이 연행됐다가 석방되는 등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취조 강도는 더욱 거세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확대시켰다.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생인 김용철씨(21)가 경찰 구금 2일 만에 고문에 의해 숨지고, 대정면 영락리의 양은하씨(27)가 역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한림면 금릉리의 박행구씨(22)가 곤봉과 돌에 찍혀 초주검 상태로 끌려가 총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해방 이후 제주사회에 경찰의 고문이 문제되지 않았으나 1947년 3.1사건 이후 경찰의 고문은 사회문제로 등장했으며 그 발단은 다른 지방에서 온 이북 출신 등 응원경찰에 의한 것으로 도민들은 보고 있었다.

다른 지방 출신 경찰관들은 제주사람을 사상이 불온하다고 의심했으며 제주사람들은 다른 지방 경찰에 대해 ‘육지것’들이라는 반감이 쌓이면서 심적 갈등은 심화되고, 그 결과 다양한 고문의 형태로 표출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렇듯 4.3 발생 직전 제주도에서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음에도 경찰의 고문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쉽지 않았다.

경찰은 고문을 은폐하려 했고 도민들은 경찰의 고문을 입증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결과, 어렵사리 고문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도민사회의 분노를 거세게 한 것이다.

경찰은 조천의 김용철씨의 죽음에 대해 지병이라고 우겼으나 시신 전체에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으며 주민들은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결국 부검이 실시됐으나 경찰의 훼방으로 1차는 건성으로 마치는 바람에 부검은 2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그 결과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사인으로 밝혀져 경찰관 5명이 구속되는 사태를 몰고 왔다.

고문현장을 목격한 증언에 따르면 경찰관들은 김씨를 거꾸로 매달아 곤봉으로 쳤다.

모슬포의 양은하씨는 경찰의 매질과 폭행, 물고문에 의해 죽음으로 이어졌으며 주민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경찰이 심심하면 장난삼아 구금된 사람을 한 명씩 불러내 고문을 했다는 것이다.

양씨의 머리칼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송곳으로 불알을 찌르는 고문을 하다가 결국 불알이 상해 숨지게 됐다는 증언이 있었고 경찰은 이를 숨기기 위해 지서 뒷마당에 시신을 묻으려다가 발각됐다는 것이다.

김씨.양씨 제주청년 2명의 고문치사사건은 1948년 4월 17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회의에서도 거론되는 등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씨의 총살사건은 4.3의 발발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파묻혀 있다가 뒤늦게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박씨는 경찰과 서청에 잡혀 집단 구타를 당한 뒤 즉결 총살당했는데 사건 전날 마을 안에서 선박 진수식에서 술에 취한 박씨가 우익청년들과 사상 논쟁을 벌이다 ‘민족을 팔아먹는 민족반역자’라고 소리 높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그의 사망일을 3월 29일께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1948년 제주사회는 단선.단정 수립을 강행하는 미군정과 일부 우익세력, 이에 반대하는 좌파세력과 김구.김규식 등 일부 우익세력, 중도파 간 대립과 갈등이 첨예한 전선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1947년 3.1사건 이후 제주도로 대거 내도한 다른 지방 출신 응원경찰과 제주도민 간 반목과 대립이 심화, 확대되는 과정에서 3명의 제주청년들이 경찰의 불법적인 고문과 총격에 의해 숨짐으로써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세력 중 도내 유일의 정치조직인 남로당 제주도당은 미군정과 경찰에 맞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게 됐고 도민의 원성의 대상인 경찰을 비밀리에 타격하려는 모의를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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