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⑥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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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사전 준비한 무장봉기"

제주4.3사건의 성격 규정과 관련해 핵심적인 사안이 바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과 개입설이다.

그동안 경찰과 군을 중심으로 한 한편에서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에 의한 4.3폭동’으로 규정하고 4.3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이 이뤄졌음을 제기했었다.

이에 대해 좌파쪽 자료와 일부 4.3연구자 등 다른 한편에서는 ‘좌파세력을 압살하기 위한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남로당 제주도당 자체의 무장봉기론’으로 맞서왔다.

이런 대립은 4.3폭동에 대한 과잉 진압의 명분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측면과 군경의 과잉 진압을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이라는 반대논리로 비화되기도 한 핵심 쟁점이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4.3과 관련된 국내외 각종 자료와 문건을 망라해 수집, 확인한 결과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나 개입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와 증언은 찾지 못했다고 밝힘으로써 일단락됐다.

그 대신 보고서는 제주4.3사건이 남로당 제주도당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무장봉기로 촉발됐음을 국내외 여러 자료와 관련자의 증언을 통해 확인시켜주고 있다.

남로당은 미 군정 하에서는 합법적인 정당이었으나 미 군정과의 대립과정에서 불법적인 집회와 시위 등의 활동으로 인해 조직 자체는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특히 제주도당의 경우 1947년 3.1사건 이후 조직 확대와 관리가 철저히 비밀리에 이뤄져 군정당국과 경찰은 도당의 규모와 인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1월 중순 도당 조직부(부장 김달삼) 연락책인 신촌 출신 김민생이 경찰에 검거되고 고문과 회유에 의해 일주일 만에 도당의 면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의 실체가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 군정 보고서는 경찰이 이 정보를 토대로 1월 22일 도당 조직의 핵심인 조직부 아지트가 있던 신촌리를 급습해 새벽 3시 회합을 갖고 있던 106명을 체포한 데 이어 같은 날 정오 이전에 63명을 추가로 검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급습 현장에서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켜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시문건 등을 확보했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아울러 1월 26일까지 총 221명을 검거하고 이중 63명의 남로당원을 석방했으며, 남로당 제주도당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주한미군 방첩대 보고서는 압수된 문서 중 유엔위원단과 총선거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내용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내용의 보고서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었다.
우선, 미 군정은 이 정보보고서가 남로당 제주도당의 폭동과 당원의 규모 및 범위를 망라하는 중요한 정보임에도 신뢰도를 중간 정도인 C-3으로 분류해 사실 가능성이 있으나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평가를 했다는 점이다.

둘째, 새벽 3시에 100명 이상 집단적으로 모이는 집회가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며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 폭동을 일으키라는 문서의 진위, 남로당원을 왜 방면했는가도 의문이다.

실제로 당시 체포됐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이 새벽에 경찰서장의 강연이 있으니 국민학교로 나오라 해서 나갔더니 경찰 트럭을 타고 관덕정 옆 경찰서까지 갔으며 그 길이 유치장에 수감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수감된 사람들에 대한 경찰의 취조는 남로당원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이덕구 등이 42일 만에 석방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전부 석방됐다는 것이다.

어쨌든 남로당 제주도당의 노출은 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으며 당 위원장인 안세훈과 김유환, 김은환, 김용관, 이좌구, 이덕구 등 당의 거물급이 대부분 검거됐다.

그러나 남로당 제주도당 폭동음모사건이었음에도 흐지부지됐는데,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지 못한 데다 3월에 이르자 5.10선거를 앞두고 정치범에 대한 대대적인 특사령이 발동되는 바람에 도당 간부들도 모두 4.3 발발 이전에 석방됐다.

그럼에도 남로당 제주도당의 이후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줘 당원들 사이에는 조직 와해는 물론 생존의 위협까지 받는 긴장감이 팽배했으며 이를 이용한 강경파의 득세와 주도로 지도부 개편으로 이어져 무장투쟁을 촉발하는 중요한 동기가 됐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남로당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단독선거 반대에 휘몰리면서 대부분 조직이 와해되고 있었으며 도당 역시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 생존을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도당 내부에서도 무장봉기를 둘러싼 강.온파 간 노선 갈등이 발생했으며 결국 강경파가 당 조직을 장악하면서 일제하 사회주의노선의 항일운동가로 구성된 온건파의 장년층이 퇴조하고 22세의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이 급부상하는 국면을 맞았다.

조직 노출로 수세에 몰린 도당 조직 수호와 방어 수단으로,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 무장투쟁을 명분으로 내건 강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도당에서 무장투쟁을 결정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에서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신촌회의에 참석했던 이삼룡(일본 도쿄 거주)은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김달삼이 봉기를 주장해 12명은 이에 동조한 반면 조몽구 등 7명은 이에 반대했으나 다수결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고 증언했다.

이삼룡은 또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으며 김달삼이 조직부장으로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고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징역살이를 하거나 제주도를 떠난 상태였다”며 “당시 공격 대상은 악질 경찰관과 서청이었지 경비대와 미 군정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4.3사건을 주도했던 도당 관계자들은 4.3 이후 증언을 통해 당시 무장봉기를 주장했던 도당 신진세력이 정세를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오류를 범했으며 낙관적으로 생각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도당 조직부 연락책으로 있다가 전향해 경찰관 생활을 했던 김생민은 “1949년 북한이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며 “강경파들은 무장투쟁을 하며 조금만 견디면 된다고 본 반면 온건파들은 우리만 고립된다고 반대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도당은 당 조직을 투쟁위원회로 개편하고 군사부와 그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신설하면서 군사총책과 총사령관에 김달삼이 등장했으며, 무장대 조직은 유격대와 자위대, 군사위원회 직속 특경대 3개 그룹으로 구성됐다.

도 전체적으로 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 등 320명이며 확보된 무기는 소총 27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이덕구 사살 현장에서 발견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가장 중요한 수류탄과 휘발유탄을 구입하지 못해 이것이 4.3투쟁 실패의 결정적인 한 원인이 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4월 3일을 거사일로 잡은 남로당 도당 군사위원회는 제주읍내 경찰감찰청과 제1구경찰서는 경비대 병력으로 점령하고 도내 14개 지서는 유격대 및 자위대원들이 습격하기로 작전을 수립했다.

또 모슬포 제9연대에 4명의 조직원을 침투시켜 제주경찰감찰청 습격에 동원하려 했으나 2명은 중도에 이탈했으며 도당에서 침투한 프락치의 병력 동원 요구를 중앙당의 프락치가 거부하는 바람에 경비대 동원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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