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 보고- ⑦ 1948년 4월 3일
4·3사건 진상 보고- ⑦ 1948년 4월 3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봉화 붉게 타오르며 '제주 섬' 광풍의 도가니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께 한라산 중턱에 산재한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는 것을 신호로 350명으로 구성된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또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그 결과 화북.신엄.구엄.남원.한림.외도.함덕.세화.대정지역에서 경찰관 4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 당했으며 2명이 행방불명된 것을 비롯해 우익인사 등 민간인도 8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날 시작된 유혈사태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6개월간 지속돼 ‘제주 섬’을 광풍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무장대는 경찰.공무원.대동청년단 단원에게 보내는 경고문과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 2개의 삐라를 통해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수립의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내걸었다.

경고문에는 “친애하는 경찰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나라와 민족을 팔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매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고 선전했다.

또 호소문에는 “시민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과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무장봉기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이는 5.10선거를 통한 남한만의 친미반공국가의 건설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미군정과 국내 단선지지세력과의 정면충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장대의 규모
그렇다면 7년여 간 제주섬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으며 3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4.3사건을 봉기한 무장대의 조직과 규모, 무기는 어떠했을까.

미군정을 비롯한 군경토벌대가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맞서야 할 정도로 4.3무장봉기를 감행한 무장대의 규모가 막강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4.3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핵심적인 사안이다.

진상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군경관변자료와 좌익계의 자료들이 자의적으로 확대.축소돼 있는 등 오류투성이인 것으로 확인됐다.

군경자료의 경우 강경진압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의 규모를 확대하고자 했고, 좌익계 역시 제주도의 무장봉기를 확대 과장함으로써 정치적인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상조사보고서는 군경관변자료에 나타난 수많은 오류를 밝히고 있다.
우선 제주경찰서와 제주경찰감찰청, 그외 많은 지서는 무장대의 공격을 받지 않았는 데도 공격을 받거나 기습점령된 것처럼 기록됐다고 밝혔다.

또 무장대의 군사훈련은 팔로군 출신이 담당했다, 무장대의 수는 적게는 200~300명에서 1만6900명이다, 백정을 매수해 경찰과 우익인사를 지명살해했다, 북한군이 유입됐다, 북한선박이 유입됐다, 소련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설 등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사실처럼 기록된 오류를 지적했다.

아울러 좌파쪽 자료도 유해진 지사, 김영배 경찰감찰청장을 비롯한 반동분자 41명의 집을 기습 파괴하고 그 명단까지 밝혀 놓았으나 실제 피습된 우익인사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고 밝혔다.

또 무장대 수는 3000명, 일제가 매몰한 무기로 무장했다, 기관총과 대포가 있다, 탄환과 수류탄이 무진장 있다는 등 관변자료보다 과장의 정도가 오히려 심했던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1949년 6월 군경토벌대가 이덕구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의 기록을 토대로 4.3무장봉기 당시 무장대의 실제 규모는 350명선, 무기는 총 30정과 수류탄 25발, 연막탄 7개 정도이고, 무장대의 10% 정도가 총을 소유했고 나머지는 죽창 등 원시적 병기에 의존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 이후 무장대 수가 240명까지 줄었다가 501명까지 확대 편성됐고 경찰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기도 했으나 총기로 무장한 유격대는 120명에 불과해 수천명으로 기록된 기존의 무장대 수는 수정돼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무장대의 조직구성
무장대가 어떻게 조직 편성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미군정보고서와 좌익계 자료에 따르면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해 인민유격대를 조직, 지역별로 3개의 연대를 편성하고 독립대로 정찰임무를 띤 특공대와 특경대, 사상교육을 전담하는 정치소조원을 각대와 소대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발간된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책임자는 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이 시기별로 맡았고, 군사부책임은 김달삼 김대진 이덕구, 총무부 이좌구 김두봉, 조직부 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농민부 김완배, 경리부 현복유, 선전부 김은한 김석환, 보급부 김귀한 정보부 김대진, 부인부 고진희가 맡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1948년 6월에 작성된 미군정보고서에는 도당위원장에 김유환, 부위원장에 조몽구, 간부부장에 현두길, 조직부장 김달삼, 선정부장 김용관, 농민부장 이종우, 청년부장 김광진, 여성부장 김금순, 재정부장 김광진으로 기록돼 있다.

이외에 제주읍에만 구성된 지하조직을 지휘하는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김응환, 조직부장 강대석, 선전부장 이창수, 학생부장 한국섭, 재정부장 이창욱이라고 기록됐으며, 이 기구는 비상시 제주도당위원회의 기능을 하는 지하조직의 최고위원회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군정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제주도심문팀이 작성한 심문보고서를 주로 활용했으며 그외에 정보원으로 미 방첩대 제주지구대, 경찰, 경비대 그리고 포로들에게서 압수한 서류와 유인물 등을 참고했다고 밝혀 미군팀의 정보력이 4.3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작동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