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도 그 선한 폭력의 지배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조선조 시대 충(忠)과 효(孝)가 음험하게 결탁해서 허약하고 부도덕한 왕통을 500년 동안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해방 후 오늘에 이르는 현대사에서도 그 선한 폭력은 여전히 그 위력은 당당했다. 그 정체는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우리 사회를 막강한 위력으로 지배해 왔다.
해방 정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선한 폭력으로 군림해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은 악의 세력이 돼 버렸다. 군인이 정권을 잡았던 20여 년 가까운 시기에는 경제성장과 국가통치이념이 모든 가치 위에 군림했다. 좀 이상한 현상이지만, 이에 반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인 민주화도 어떻게 보면 그러한 성격을 벗지 못했다.
왜냐면 그 민주화 세력이 어느 날부터 정치이익집단이 됐고, 민주화운동 이력이 정치 권력을 잡는 데 기여하는 등 그 정신이 퇴색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민주화의 반열에서 더 나아가서는 민족과 통일이 선한 가치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변하자, 그 전시대에는 ‘공산주의자’가 저주스러운 주홍글씨였다면, 이 시대에 와서는 ‘반통일보수세력’이 마치 민족의 역적처럼 손가락질을 받게 됐다.
이러한 선한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얼마나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인가. 어느 누가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탄탄한 정부와 민족의 통일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그 외피만으로도 어느 정도 과정의 문제성을 간과해 버릴 만한 위력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이 사회에서 누구도 그것이 혹 저지를 수도 있는 정당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지적해 주지 않았다. 대부분 지성인과 비판 세력들은 그 이데올로기를 선도하는 그룹에 끼이기를 은근히 소망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 선함의 가면이 벗겨질 즈음, 이미 그 기력이 쇠하여 별로 힘을 못 쓸 때쯤 돼서야, 너도나도 그 탈을 벗기기에 앞장서면서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 일에 몰두해 왔다.
그러기에 우리 현대사 반세기에 그 탈만 변했을 뿐, 여전히 선한 이데올로기의 폭력은 국민소득 1만달러, 월드컵 4강 진입, 올림픽 개최국이며 OECD 가입국인 이 나라에서 여전히 행세하고 있다.
최근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두된 선한 이데올로기는 ‘개혁’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즈음 ‘반개혁’ 분자로 낙인찍히면 부도덕했기에 지탄받아야 할 세력이 돼버린다. 개혁이 돼야 국가 사회가 발전하고 통일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개혁을 위해서는 다소 그 방법과 과정이 정당하지 않아도 묵과할 수 있다. 최근 개혁을 부르짖는 시민운동단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선 그 단체 이름부터가 너무나 ‘정당하고 선’해서 감히 소박하게 그날그날 살아가는 일반 시민으로서는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살이가 힘든 요즈음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것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시민운동가들의 그 열정은 매우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문제는 현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너무 경직돼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칫 그들의 활동이 선한 폭력으로 일탈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 점에서는 새 정부가 추진하는 일도 그렇다. 절대적인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21세기처럼 다원화시대에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정직함과 성실함만이 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 내 주장만 정당하다는 식은, 과거 우리가 지향했던 선한 가치들이 스스로 그 모순 속에 비틀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소중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행복은 과정에 있을 뿐이다. 과정이 옳고 선하고 행복할 때, 그것 다음에 오는 과정도 그렇게 된다. 이렇게 역사는 만들어진다. 이 아름다운 역사를 위해 선한 폭력의 시대가 끝나야 한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옳게 만들겠다는 것은 위험하고 무모하다. 역사는 만들어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제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