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길 찾았던 16살 때 꿈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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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6억원 기탁 사업가 이왈옥씨

어일적 渡日 철공소서 일하며 야학
사업 성공 79년 귀향 관광호텔 경영
“고향 젊은이들에게 작은 보탬 되길”


“평생 가슴에 품었던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향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재일 사업가가 제주대 발전기금으로 6억원을 기탁,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왈옥씨(78). 30일 제주대 본관 회의실에서 기금을 기탁하면서 부만근 총장의 손을 꼭 잡은 그의 눈가엔 지난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듯했다.

▲어린 시절=1925년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리에서 농부인 아버지 이성숙씨와 어머니 고달지씨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세 때 어머니를 여읜 데 이어 14세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지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당시 누구에게나 삶이 궁핍했지만 부모를 잃은 데다 누나마저 일찍 결혼하면서 그는 동생들의 끼니를 매일매일 걱정해야 했다.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고, 일본에 가면 잘살 수 있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에 그는 16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생활=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녔다. 젊은 시절 그에게 일본에서의 삶은 배고픔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도쿄의 앞바다에서 고향을 그리며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경야독으로 배움의 꿈을 버리지 않은 그는 1941년 도쿄에 소재한 성립상업학교에 입학해 당시 선망의 직종이었던 은행원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년 뒤인 1943년 태평양 전쟁으로 극도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또다시 시련을 맞게 된다.

1943년 여름 잠시 제주를 찾아 눈에 밟혔던 동생 둘을 데리고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 후 그는 1948년 야구공과 테니스공 등을 만드는 협화고무공업소를 설립했다. 근면과 성실성만은 자신이 있었다. 그의 사업은 1955년 핸드백 등을 만드는 산화공예, 1967년 산신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72년 빌딩 임대업인 신세기빌딩주식회사까지 설립했다.

▲고향 귀국=‘실천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허식이 없고, 변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신조로 삼아 살아왔다. 1979년 10월 도일 36년 만에 처음 꿈에도 그리던 제주를 찾았다.

이후 제주팔레스개발주식회사를 비롯해 제주팔레스관광호텔, 제주하와이관광호텔을 경영하며 틈틈이 일본에 있는 사업체를 오가고 있다.

고향 판포리는 언제나 그의 가슴 한구석에 소중히 자리하고 있다.

그는 고향 후배들인 판포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장학금을 해마다 지급한다.

그는 배움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떠났던 16세 때의 꿈을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부인 양순선씨(72) 사이에 3남3녀를 둔 그는 “일본에서 자란 자식들에게도 제주 사투리를 가르쳐주는 등 항상 고향을 강조한다”면서 “여생을 고향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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