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 보고 - ⑨ 미군정의 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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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강경진압 초강수…제주 피바람 예고

우익청년단 오라리 방화
하지 사령관 평화협상 직전 개입
“무장대 활동 신속 진압” 명령


▲오라리 방화사건과 무력강경진압으로 급선회

평화협상의 성사로 4.3사태의 원만한 해결이 기대되던 상황에서 무장대와 우익세력 간 유혈충돌이 잦았던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5월 1일 발생한 방화사건은 사태를 새로운 국면으로 돌려세우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이 사건은 무장대에 의해 숨진 우익청년단원의 부인장례식에 참석한 우익청년들이 좌파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5세대 12채의 민가를 불태웠고 이 사실을 안 무장대가 쫓아와 추격하던 중 경찰 출신 어머니를 살해하면서 발생했다.

평화협상 당사자인 김익렬 제9연대장은 조사결과 경찰의 후원 아래 서청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자행한 방화라고 판단, 미군정에 보고했으나 묵살당했고 미군정은 경찰의 보고대로 무장대의 소행이라고 막무가내로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 연대장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해임됐고, 박진경 연대장으로 교체되지만 경비대원들의 불만을 자초해 결국 박 연대장의 암살로 이어지게 된다.

이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 촬영반에 의해 공중과 지상에서 입체적으로 촬영됐는데, 그 영상기록은 긴박하게 돌아갔던 당시 상황이 준비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무성영화의 필름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돼 있는데 제주4.3사건의 초기상황을 다룬 유일한 영상기록으로, 제목도 ‘제주도의 메이데이’라고 붙여졌으며 오라리사건이 무장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편집돼 있어 강경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 미군이 이미 강경책을 구사하도록 결정돼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미군정은 어렵사리 이뤄진 귀순공작을 위한 평화협상의 합의를 깨고 강경 무력진압의 초강수를 두고 제주도를 피바람 속으로 몰아넣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장군이 평화협상 직전 개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남한내 민간업무를 담당하는 미군정청은 군사업무를 다루는 주한미군사령부의 산하조직이었던 관계로 군사적 측면에서 주한미군사령관의 통제하에 있었다.

실제로 하지 장군은 평화협상 직전 제주도에 보낸 슈 중령에게 경비대는 즉시 임무를 수행할 것, 모든 종류의 시민 무질서를 종식시킬 것, 무장대 활동을 신속하게 약화시키기 위해 경비대와 경찰이 확실한 결속을 할 것, 미군은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하지 장군은 경비대를 동원해 서둘러 사태를 진압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평화협상에 대해선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아 딘 군정장관의 방침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하지 장군의 명령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슈 중령은 “제주도에서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더 나아가 제주도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 군경의 성패에 남한 인민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는 하지 장군의 말을 경비대와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장교들에게 전했다.

아울러 슈 중령은 9연대를 통해 평화협상을 하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 부산에서 파견된 5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펴는 등 향후 무력진압에 대비해 무장대의 전력을 탐색하는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이다.

더욱이 슈 중령은 제주도를 떠난 후 현재 제주도의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하고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선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고 하지 장군에게 보고한 것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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