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 - ⑩ 미군정과 무장대의 무력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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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 연대장 초강경진압 벌이다
불만 품은 부하 장교 등에게 암살
이후 피비린내 나는 집단학살 광풍


▲5.10선거의 무효화
1948년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한반도의 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특히 미군정은 단선.단정 반대가 4월 3일 무장봉기의 주요 슬로건이었던 제주도의 상황에 촉각을 세우고 경비대 9연대장의 교체, 경비대 병력 증강, 응원경찰 파견, 향보단 조직.배치, 군정 수뇌부의 현지 시찰 등을 통해 5.10선거 실시에 집중했다.

무장대는 선거관리사무소를 습격하거나 선거관리위원을 살해하는 등 선거 방해에 나섰고 미군정과 경찰은 무력으로 대응, 5월 7일부터 10일 사이에 29명의 사망자(이 중 무장대 사망자는 21명)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무장대는 5월 5일부터 선거를 보이콧하는 방법으로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내기 시작, 선거가 끝난 후에 마을로 돌아오도록 해 마을은 텅 비다시피 했다.

그 결과 제주도는 3개 투표구 중 남제주군 선거구만 과반수 투표율을 기록해 무소속 오용국의 당선이 확정됐을 뿐 북제주군 갑구과 을구는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가 무효화됐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2개 선거구에 대해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제주의 사태가 더욱 악화되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돼 1년 뒤인 1949년 5월 10일에야 실시됐다.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과 제11연대의 재편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5월 20일께 미 6사단 광주주둔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하고 모든 진압작전을 지휘.통솔하도록 했다.

딘 군정장관의 특명을 받은 브라운 대령은 제주도에 온 후 “제주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말해 강경 진압의 방침을 함축적으로 보여줬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그동안 온건정책을 추구해온 김익렬 경비대 9연대장을 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그 후임으로 교체했다.

박 연대장은 영어에 능통하고 일제 말기 일본군으로 제주도에 주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 연대장은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키고 9연대를 11연대에 합편하면서 11연대장이 됐다. 11연대는 기존 9연대 1개 대대, 부산 5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대구 6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11연대의 1개 대대와 연대 기간요원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박 연대장이 부임 직후인 5월 20일 제주 출신 경비대 병사 41명이 집단으로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진압작전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박 연대장은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하고 이를 작전에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박 연대장은 브라운 대령이 언급한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땅까지 모조리 휩쓸어버리는 작전’을 충실히 이행한 공로로 제주에 온 지 1개월도 안 돼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는데, 자신의 승진 축하연 뒤 그의 작전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등에게 자신의 숙소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박 연대장이 부임한 후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불과 한 달 만에 수천명의 포로를 양산해낸 작전은 주민들을 더욱 산으로 도망치게 했고 자신은 암살당함으로써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박진경 연대장의 피살사건은 육군장 제1호로 기록된 고급 장교의 첫 희생이어서 재판과정 또한 주목을 끌었는데, 암살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된 9명 중 2명은 무혐의로 풀려나고 문 중위와 손 하사에 대해서는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산기슭에서 총살이 집행됐으며 나머지는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판과정에서 ‘김달삼 지령설’이 불거지는 바람에 김익렬 전 연대장도 연루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총살을 당한 문 중위와 손 하사는 동족상잔을 피해야 한다는 김익렬 전 연대장의 방침에 찬동했고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000만 민족을 위한 것인만큼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군정은 이후 11연대장에 최경록을 임명했다가 7월 15일자로 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송요찬을 임명하고 원래 제주 출신인 9연대 병력만을 제주에 남기고 11연대를 수원으로 철수시켰다.

이는 미군정이 제주도에서 대규모 학살을 해서라도 제주도 사태의 강경 진압을 요구한 것을 최경록 연대장은 오직 학살의 수단으로만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기피한 반면 송요찬은 이를 충실히 이행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송요찬이 9연대장으로 있을 1948년 가을바람이 불면서 제주도는 피비린내 나는 집단학살의 광풍에 미쳐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제주도에 응원경찰관 450명을 파견하는 등 진압작전에 동원했으나 도민과의 마찰이 심해지자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을 정직시키고 제주 출신 김봉호를 청장으로 교체했으며, 반공일변도의 강공책을 구사해온 유해진 지사를 제주 출신 임관호로 교체하는 등 유화책을 내보이기도 했다.

▲김달삼의 월북
미군정의 대응이 조기 강경진압정책으로 굳어져가던 7월 북한의 정권 수립을 위해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열렸는데, 지하선거는 8월 21일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시.군별 5~7명씩 1080명)에 참가할 남측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4.3사건이 벌어지고 있던 제주에서의 지하선거는 주로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주로 중산간 마을과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백지날인은 대부분 강압에 못 이겨 이뤄졌는데, 실제로 서귀포에서는 이 선거를 거부한 마을 주민 5명이 폭도들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기도 했다고 미군정 보고서에는 기록돼 있다.

또 이 같은 백지날인이 빌미가 돼 제주도에서는 도장 한 번 찍은 것이 총살의 원인이 될 정도로 훗날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결국 지하선거를 통해 제주도에서는 6명이 대표로 선출돼 8월 21일 1080명 중 100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해주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이 중에는 무장대 총책이었던 김달삼과 안세훈,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이 있었던 것으로 좌파쪽 자료에는 기록돼 있다.

김달삼이 언제 떠났는지 확실치 않으나 미군정 보고서에는 8월 2일 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배를 타고 목포로 떠났으며 북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고 기록돼 있다.

해주대회 첫날 35명을 뽑는 주석단 선거가 있었는데 20대 중반의 김달삼은 허헌, 박헌영, 홍명희 등 좌파거물과 나란히 주석단의 일원으로 뽑혔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 북한측 212명, 남한측 360명 중 제주도대표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가 선출됐다.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김달삼 등의 월북은 제주4.3사건의 기본적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는 분단된 남과 북에 적대적인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무장대가 북한정권을 지지함으로써 제주도는 더욱 강경한 정부의 자세를 맞게 됐다.

김달삼이 제주를 떠나자 무장대의 지휘총책으로 이덕구가 나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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