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 - ⑪ 제주도 경비사령부의 창설
4·3사건 진상보고 - ⑪ 제주도 경비사령부의 창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4개월여 '초토화작전' - 중산간 '불바다'

美, 경비사령부 창설 작전 통제
해안 봉쇄·중산간 마을 통행금지
서북청년단 위세·만행 극에 달해


5.10선거 이후 제주도는 남쪽과 북쪽의 정부 수립이 진행되면서 여름동안 잠시 소강국면을 맞았으나 가을바람이 불면서 이른바 ‘초토화작전’이라는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됨에 따라 주민 학살 참극의 현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48년 11월 중순 시작된 ‘초토화작전’은 1949년 3월까지 4개월여간 지속됐는데 당시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해 4.3사건 전개과정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기간 4.3 피해자의 80%가 희생된 것으로 분석되며 현재 사라진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이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도를 비극으로 몰고간 ‘초토화작전’의 책임이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외적 상황을 보면 이승만 단독 정부가 수립됐음에도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통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둘러싸고 지배세력간 대립이 심화됐으며 여수 14연대와 대구 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단독정부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친미 반공을 내세운 이승만 정부의 위기였으며 이 같은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카드로 제주도가 다뤄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제정도 이때 이뤄졌다.
아울러 미.소 간 냉전이 심화되면서 양군의 철수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전개되고 남한에 진주해 있던 미군 일부가 철수하던 시기여서 이승만 정부로서는 미군의 주둔을 지속시키기 위한 상황의 반전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음에도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 간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갖게 됐다.

국군을 지휘.통제할 주한미군의 핵심으로 임시군사고문단이 전면에 나서게 됐으며 고문단 단장인 로버트 준장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송요찬을 9연대장으로 임명한 장본인이자 그의 활약상을 극찬하고 사실을 왜곡하면서 주민 대량 학살을 합리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로버트 준장은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를 창설하고 제주도 작전에 대한 모든 상황을 통제했으며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법도 없는 상황에서 계엄령을 선포할 당시 적극 개입하기도 했다.

또 로버트 준장은 제주도에 CIA를 설치, 운영토록 했으며 “한국군은 미국인 대신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제주도에서 이뤄진 군경토벌대의 주민 대량 학살과 강경 진압이 미국을 위한 것임을 노골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은 군사력 및 경찰력 강화를 의미했고 곧이어 이뤄진 제주도 사태 진압을 위한 계엄령 선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특히 제주 출신 김봉호 경찰감찰청장이 제주도에 대한 대규모 진압작전과 관련해 “딘 군정장관을 비롯한 중앙 수뇌부측이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밝혀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된 순간 정해진 것이었던 셈이다.

이제 제주도 사태는 남한 정부에 단순한 지역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고 주한미군 철수를 앞둔 미군에는 냉전 초기 자신들이 설정하려는 세계 질서에 가장 큰 걸림돌로 등장했다.

실제로 그동안 온건정책을 펴온 제주 출신 김 청장이 10월 5일자로 평남 출신 홍순봉으로 교체됨과 동시에 서북청년단이 대거 내도하기 시작했다.

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 6일 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포고문을 발표,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종료시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에 대한 무허가 통행 금지를 포고하고 위반자는 폭도배로 인정해 총살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울러 10월 18일자로 제주도 해안이 봉쇄되면서 제주섬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제주도를 완전 봉쇄하고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 전 마을에 통행을 금지시킴으로써 중산간에 주민의 거주를 사실상 금지하고 중산간을 초토화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19일 제주도로 파병될 예정이던 여수 주둔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김상겸 제주도경비사령관은 문책을 받아 파면되고 강경파인 송요찬이 진압군의 총책임자인 경비사령관을 맡으면서 제주도에 대한 강경작전은 더욱 가속됐다.

아울러 4.3사건 발생의 단초가 되고 제주도민과 극단적 대립선상에 있던 서북청년단이 속속 제주도로 들어와 군과 경찰에 배치되면서 진압의 최일선에 나서게 됐고 제주 출신 군경인사는 점점 더 뒤로 밀려났다.

당시 제주도에서 서북청년단의 위세와 만행의 대표적인 사례가 1948년 11월 9일 발생한 제주도청 김두현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물자 보급 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단원들에게 희생되고 공산주의자로 매도됐으며 고문치사를 자행한 서청단원들은 처벌받기는커녕 군인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