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Slow)’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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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산다. 식당에 가도 “빨리 주세요”, 택시를 잡아 타도 “빨리 갑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온다. 서두를 일이 아닌데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한다.

집안에서는 하루 종일 수십번을 더 듣는다. “빨리 일어나라” “빨리 밥 먹어라” “빨리 학교가라” “빨리 숙제해라” “빨리 불끄고 자라”...

차나 음식을 마시거나 먹는 것도 속전속결이다. 마치 몸속에 뭔가를 채우듯 허겁지겁이다. 도로에서는 앞선 차량이 속도를 늦추면 뒤에서 빵빵 울려대거나 라이트를 번개같이 깜빡인다. 그 뿐인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축복된 결혼식도 뭔가에 쫓기듯 20여 분만에 끝낸다.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예전 군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착순’에 이골이 났던 기억을 갖고 있다. 남보다 빨라야, 먼저라야 심신이 편하고 살아 남았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는 빠른 게 미덕이다. 순서를 기다리는 않고 끼어드는 일이 다반사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도 ‘빨리 빨리’에 빨리 적응한다.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은 “안녕하세요”이고, 그 다음이 “빨리 빨리”라고 한다.

왜 이렇게 조급한가. 어느 교수는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또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속도에 대한 집착이 삶의 행동철학으로 굳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빨리 빨리’ 문화는 우리 경제와 사회를 역시 빠르게 성장시켰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여타 국가들보다 빨랐고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속도가 곧 경쟁력인 정보화 시대에 한국의 ‘빨리 빨리’ 기질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빨리 빨리’가 가져온 후유증과 폐단도 만만치 않다. 각종 민원에 급행료를 건네야 일이 빨리 처리되던 시절이 있었다. 각종 대형 건설공사의 부실과 성과내기 전시행정 등도 ‘빨리 빨리’ 조급증의 산물이다. 우리는 ‘빨리 빨리’를 외치며 여유를 잃었고, 남보다 뒤처지면 안된다는 부담과 강박관념이 어릴때부터 스트레스로 작용하면서 사회는 각박하고 삭막해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빠름’을 요구하는 사회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른바 ‘슬로우(Slow)’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제주에서는 ‘슬로우’가 관광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 유무형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놀멍, 쉬멍, 걸으멍’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제주올레걷기’가 각광을 받고 있다. 서귀포시는 슬로우도시만들기 부서도 생겼다.

생각해보면 제주는 여느 지역보다 ‘슬로우’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하다. 올레를 비롯해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가벼운 등정이 가능한 오름, 오밀조밀한 해안선, 고유한 전통문화와 향토색이 짙은 재래음식,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휴양림과 농어촌 체험마을 등..

‘슬로우’는 속도전을 벌이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게으름도, 부적응도 아니다. 지나치게 빨리 진행되는 사회문화의 흐름에 맞서 환경, 자연, 시간을 존중하며 자기 자신만의 속도를 찾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도 이러한 ‘슬로우’에 빠져드려 한다. 잠시나마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찾고 자기 충전의 시간을 바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슬로우를 접목한 관광아이템을 개발하고 생태관광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슬로우’가 제주관광의 매력 있는 관광자원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책과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이에 대한 정책적 관심과 투자가 더욱 필요해 보인다.<오택진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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