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 - ⑫ 주민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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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폭도로 처형"…두달새 2201명 사살
무차별 진압작전으로 섬 전체 초토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방화 만행


제주지역 계엄사령관을 맡은 송요찬 제9연대장은 강경작전에 앞서 언론을 통제하고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제주도를 고립시켰다.

이제 제주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외부에서는 알 수 없게 됐으며 무분별한 진압작전이 전개되고 이를 제어할 아무런 통제수단이 없게 된 것이다.

당시 제주신보 기자였던 김기오씨(79)는 증언을 통해 “폭도라며 처형된 사람 중 장님이 있어 이를 기사화하자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풀려났다”며 “이후 한 주민이 시체가 된 채 길바닥에 버려지자 이를 또 다시 기사화하자 날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그날로 제주도를 떠났는데 그 때가 7월께이다”라고 말했다.

무차별적인 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11월에 이르러서는 사전검열을 실시하면서 군 관계 기사에 대한 보도를 철저히 통제했다.

이 때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간 벌어진 초토화작전은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지는 등 제주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4.3위원회에 신고된 15세 미만 희생자 중 76.5%가 이때 살해됐으며 61세 이상 희생자의 76.6%가 이 시기에 집중됐다.

당시 9연대 소속이었던 윤태준 선임하사는 “초토화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송요찬 연대장의 독단인지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군정보고서에서도 “제주도 주둔 연대장은 11월 20일부터 27일까지 122명의 반란자들을 생포하고 576명을 사살했으며 10월 1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는 1625명을 사살하고 1383명을 생포했으나 무기는 2개월간 60여 개만 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군경진압대와 정부 수뇌부는 초토화작전을 부인했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미군보고서도 초토화작전 기간에는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부분기록된 사실 속에서 초토화작전은 중산간마을에 대한 방화와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총살의 형태로 벌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진압군은 일부 중산간마을의 경우 소개령이 채 전해지기도 전에 마을을 덮쳐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총살했을 뿐 아니라, 마을이 소개돼 해변마을로 온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중 청년 한 명만 없어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총살했다.

이 때문에 미군 고문관도 “군의 무분별한 총살이 주민들을 오히려 무장대에 가담시키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토벌대는 소개령 이후 중산간 마을이나 산악지역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 발각 즉시 사살했다.

당초 중산간 마을 주민을 해변마을로 이동시켜 무장대와의 연계를 차단함으로써 무장세력을 궤멸시킨다는 작전이 이제는 전과 올리기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미군정보고서는 제9연대를 12월 말로 여순사건 진압에 공적을 세운 대전의 제2연대와 맞교대할 예정이었는데 제주를 떠나기 전 여순사건 진압이라는 업적에 필적할 전과를 올렸다는 분석을 했다.

실제로 12월 중순 제9연대의 전과를 보면 머릿수 채우기에 급급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대살’, ‘자수사건’, ‘함정토벌’, 그리고 산중에 은신한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한 것이다.

우선 ‘대살’은 가족 중 청년 한 명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며 총살한 것으로,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이 같은 이유로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에게 총살극을 구경시켰다고 해서 ‘관광총살’이라고 부른다.

‘자수사건’은 과거 자신의 죄를 자백한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으로, 자수하면 살려주나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한다고 협박해 겁에 질린 주민들이 자수하면 집단 총살하는 것이다.

이의 대표적인 사건이 ‘박성내 사건’으로, 조천면 관내에서 자수한 200명을 수용하고 있다가 1948년 12월 21일 토벌에 따라갈 사람을 차에 타라고 속여 150명을 박성내라는 하천변에서 집단 총살한 것이다.

‘함정토벌’은 토벌대가 무장대 복장을 하고 민간에 들어가 협조를 요청하고 이에 응한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으로, 제주읍 도평리 주민 70명이 몰살 당한 사건이 대표적 사례이다.

1992년 구좌읍 중산간지대의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굴된 사건은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당시 미군정보고서는 “9연대는 무차별적인 공포통치로 반란자들에 대해 상당히 성공적인 전투를 수행했으나 중산간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며 “9연대의 점령기간 대부분의 섬 주민들에 대한 살상이 자행됐고 그 기간중 반도 활동은 거의 없었으나 그러한 계획은 새롭게 반도대열에 합류하는 자들을 양산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군으로부터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키며 진압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은 제9연대는 1948년 12월 29일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중령)로 교체됐다.

이것은 제주 출신이 다수 포함된 제9연대를 제주도에서 완전 배제하고,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한 제2연대가 제주도에서 더욱 강경한 작전으로 제주도의 사태를 조기에 매듭짓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제주사건을 발근색원하라고 지시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2연대는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한 실전 경험이 있었고 제주도를 출발하기 이전에 2연대내의 공산주의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예방책까지 실시됐다.

함병선 연대장은 송요찬 9연대장과 같은 일본군 준위 출신으로 제주에 오기 전 제2연대에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특별중대라는 이름으로 보강시켰으며 뒤이어 성산포경찰서와 모슬포경찰서를 신설하는 등 경찰조직을 강화했다.

아울러 함병선 연대장은 항공사령부의 비행기와 유격대대를 파견받아 지휘했으며 1949년 1월 20일부터는 2연대를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편성하기도 했다.

제2연대는 당초 1단계 선무공작, 2단계 반란자 귀순공작 강화, 3단계 무력소탕 등 3단계로 나누어 적의 최후의 한 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고립화작전을 실시키로 했다.

이는 9연대의 진압작전으로 폭도진압이 일단락되고 무장대의 활동도 거의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한 데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작전계획은 연대 교체기를 틈탄 무장대의 공세로 수정돼 강경진압으로 돌아서게 됐다.

2연대는 무장대가 있는 산악지역에는 가지 못한 채 무장대에 대한 보복을 해안마을 사람들에게 자행했는데, 재판도 없이 주민들을 대규모로 즉결처형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무장대의 공세는 1949년 1월 1일 제주읍 오등리에 주둔한 제3대대를 기습공격하면서 시작되자 2연대는 소련선박 출현설을 제기하며 계엄령의 지속을 요청하는 등 강경작전을 위한 분위기 조성으로 맞섰다.

간헐적으로 무장대와 2연대 간 무력충돌이 있었는데 1월 12일 의귀리 전투를 계기로 무장대가 급속히 약화된다.

200명이 동원돼 기습공격을 했던 무장대가 51명이 사살됨으로써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후 2연대는 의귀교에 수용된 80여 명을 집단으로 사살해 민간인에 대한 보복총살을 감행했는데 나중에 마을 주민들은 시신을 거둬 합장하고 큰 비석을 세웠다.

이어 1월 17일에는 소설가 현기영의 소설로 유명한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는 북촌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2연대의 병력 일부가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자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와 동복리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집단 총살한 사건이다.

이어 2월 4일 제주읍 봉개지구에서 육.해.공 합동으로 펼쳐진 대규모 작전으로 360명이 사살되고 130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그러나 대부분 희생자들이 비무장 민간인과 노약자들이었는데 이날의 사건으로 봉개.용강.회천리는 쑥밭이 됐다.

함병선 연대장은 사태가 종결된 후 주민들이 다시 모여 마을을 재건하자 자신의 성과 작전참모 김명 대위의 이름을 조합해 마을이름을 함명리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무장대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궤멸상태에 이른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제2연대가 산악소탕전에 나선 3월 중순께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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