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사애생(尊師愛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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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가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은 세종대왕 탄신일에 연유한다. 우리 고유글자인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여 인류 문맹 퇴치와 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한 스승, 세종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어느 교수는 “고아원을 만들었더니 고아가 더 많아지더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에게는 무슨무슨 날이 필요없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스승의 날을 맞아 대학 은사(恩師)이며 나의 정신적 지주인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선생님과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님, 두 분 스승을 떠올리면서 스승의 참뜻을 한 번 되새겨 본다.

당나라 한퇴지(韓退之:韓愈)가 쓴 ‘사설(師說)’이란 글에서 “스승이란 도(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니, 사람은 그 도를 스승으로 삼는다”고 했다. 여기서 도란 과연 무엇인가? 일석 이희승 선생님은 ‘소경의 잠꼬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한가지는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일이요, 다른 한가지는 행실을 바르게 하여 주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곧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람은 지식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준다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고 정직하게 기르고 닦아주는 것을 뜻한다. 인격적으로 감화를 줘 배우는 사람의 인격을 함양해 준다. 지식을 가르쳐주고 인격을 함양시켜주는 이 두 가지는 교육의 근본 목적이다. 선생은 반드시 이 둘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라.
오늘 나는 왜 하필이면 공자가 스승이 됐는지 그 까닭을 한 번 생각해 본다.

어느 날 제자 자하(子夏)가 그 까닭을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공자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회(顔回)는 어진 길, 즉 인도(仁道)를 잘 지키지만 때에 따라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권도(權道)를 쓸 줄 모르고, 자공(子貢)은 언변(言辯)은 좋지만 때에 따라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음이 더 효과가 있음을 모르고, 자로(子路)는 남보다 용기가 있지만 때에 따라서 겁을 갖고 삼가는 것이 도리어 더 큰 용기인 것을 모르고, 자장(子張)은 몸가짐을 점잖게 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점잖지 못한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는 일은 하지 못한다. 내가 이들 네 사람들의 장점을 각기 알아주는 것이 바로 그들이 나를 의심치 않고, 나를 스승으로 섬기게 된 까닭이오.”

이는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이다. 이들 네 사람은 공자의 수제자이다. 나는 여기서 한마디로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과 학생은 서로 반려자임을 말하고 싶다.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정신을 갖게 된다.

교육이란 단순히 지식만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오, ‘인격 교류’라야 한다. 인격의 뒷받침이 없는 지식은 위험하다. 그것은 마치 철학이 없는 지식과 학문은 독약보다 더 무서운 것과 같다. 교육자의 초점은 바로 사도(師道)이다. 자식이 부풍모습(父風母習)하면 머리가 좋듯이, 제자가 선생을 능가하려면 사풍제습(師風弟習)해야 한다. 학생이 선생을 모르면 스승도 모르는 법이다. 선생과 학생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

중국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경사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는 만나기 어렵다(經師易遇 人師難遇).” 이를 풀어 말하면 경전의 자구(字句)를 가르치는 선생, 즉 지식을 전달만 해주는 선생은 많아도 사람이 사람답게 올바른 행동과 옳게 의롭게 사는 길을 인도해 주는 인격을 가르치는 참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오늘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물고, 학생은 많아도 제자는 적다”는 말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닐까? 묵묵히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어머니가 애기 재우듯 애무(愛撫)의 심정으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은 선생님을 부모처럼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선생을 존경하고 학생을 사랑하는 ‘존사애생(尊師愛生)’의 정신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사제간의 꽃이 피고, 위해한 스승 밑에 위대한 인물이 나게 된다.
교육이란 원래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꿈과 용기를 불어넣는 일이며,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내는 일이다. 학생을 가르치려는 사람일수록 먼저 자신이 배워야 한다. 모르면서 남을 가르칠 수 없다. 배워야 산다.

그런데 흔히 교육 현장에서 선생이 저지를 수 있는 ‘선생의 실수 일곱 가지’를 꼬집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저지르기 쉬운 7가지 실수는 욕정, 탐식, 성냄, 탐욕, 질투, 교만, 권태이다. 이 중에서 욕정, 탐식, 성냄의 세 가지 실수는 열정의 죄를 낳게 하며, 그 실수가 잦을수록 교실 수업은 엉망이 된다. 또 탐욕, 질투, 교만의 세 가지 실수는 비정의 죄를 낳게 하며, 그 실수는 교직사회를 갈등과 긴장에 휩싸이게 한다.

게다가 권태는 미적지근한 실수로 무지와 무관심을 낳게 한다. 권태로 인한 무지와 무관심은 다른 실수보다 더 나쁜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무지이다. 아무것에도 간섭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목적이 없는 것은 무관심이다.

교육에서 무지의 가르침은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겠다고 무조건 나서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진정한 선생은 학생한테서 배우는 일이다. 학생을 통해 자기 초상화를 그려내는 일이다. 때로는 옆길을 걷거나 삶을 포기한 학생일수록 그들을 어루만져 상처 난 그들의 영혼을 구해내는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다. 그런 선생님이야말로 참된 스승이시다. 그런 선생님을 학생들은 절로 존경하며 진정한 고마움을 갖는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땅과 같아서(역여천지(亦如天地)여서) 부모님과 한가지다.

그래서 스승의 날은 존사애생(尊師愛生)의 날이어야 한다. 서로가 더불어 배우고, 서로가 존경하고, 다함께 기리는 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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