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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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7일 경찰부대가
정글에서 교전끝에 사살” 보도


1948년 11월 중순부터 벌어진 9연대와 2연대의 강경진압작전에 이어 1949년 3월 설치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산악소탕전과 귀순공작으로 무장대 세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1949년 4월 제주를 시찰했던 신성모 국방장관은 ‘현재 남아 있는 폭도는 40~50명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그 무렵 한 언론은 무장대 출신의 포로의 말을 인용해 ‘이덕구 이하 20여 명이 무기를 땅에 묻고 분산하는 운명에 빠졌으며 서로가 투항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4월 중순께 무장대 간부급이 사살 또는 생포됨으로써 세력이 실질적으로 와해됐고 이창정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보도대장은 “4월 21일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김용관이 사살됨으로써 소탕전은 완전히 종결됐다”고 밝혔다.

이어 6월 7일에는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됐다.

무장대 세력이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나 이덕구는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미치는 영향은 컸다.

당시 한 언론은 이덕구 사살과 관련, ‘제주도 반도사령관 이덕구는 지난 7일 경찰부대에 사살됐다. 즉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 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지난 7일 오후 4시께 속칭 작은 가오리 부근 정글 속에서 반도사령관 이덕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보신부하 1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덕구 시체는 방금 제주경찰서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제주에 주둔하던 2연대는 인천으로 이동하고 김용주 중령이 이끄는 독립 제1대대가 제주로 들어와 12월 27일까지 5개월간 주둔하며 마지막 소탕작전을 벌인다.

독립 제1대대는 육군 수색학교의 후신으로 지리산지구작전에 참여해 실전경험을 쌓아온 전투부대였다.

김용주는 마지막 소탕작전과 관련해 “사복 1개 중대를 면직원, 운전수, 교사 등 각 기관에 취직을 시켜 정보를 수집했으며 그 결과 완전히 깨끗해졌다”며 “내 앞에 데려온 사람들은 재판을 하면 거의 사형인데 제주비행장 서쪽에 굴을 파고 거기서 전부 처치했다”고 증언했다.

함정을 판 후 정보를 수집한 결과를 토대로 재판절차도 없이 총살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김용주는 1948년 12월 31일자로 계엄령이 해제됐는데도 그 효력을 지속시켰고 그 자신을 계엄사령관이라고 표현했다.

독립대대가 철수하자 이번에는 1200여 명으로 편성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가 12월 28일 제주에 도착해 사령부만 제주읍에 두고 나머지는 모슬포에 주둔시켰다.

신현준은 자신의 임무로 해병의 훈련, 피폐한 30만 도민을 지원하고 한라산 공비를 토벌하는 등 토벌전과 민심수습임을 분명히 했다.

해병대는 6.25전쟁이 나자 제주도지구 계엄사령부로 편성됐는데 본래의 임무인 민심수습에는 실패했다.

예비검속자의 불법 학살, 제주도유지사건의 조작 등이 이 시기에 이뤄진 것들이다.

아울러 민폐를 끼치는 과정에서 당시 강성모 서귀면장을 불법적으로 처형하기도 했다.

당시 김호겸 서귀포경찰서장은 “강 면장은 해병대가 자신들의 부식을 마련하기 위해 몇 시간내로 소 몇 마리 고사리 몇 백 관을 준비하라는 강요에 순응하지 않자 6.25전쟁이 발발하자 괘씸죄로 시체도 찾지 못하게 학살시켜버렸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강 면장의 유족들은 4.19혁명이 일어나자 신현준을 고발했는데 고발장은 1960년 7월 1일 양민학살 고발 제2호로 제주지검에 접수돼 수사가 진행 중이었으나 5.16군사쿠데타가 발행하는 바람에 진상 규명작업은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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