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 - ⑭ 한국전쟁과 예비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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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하자 예비검속
‘또다시 죽음의 섬’


군경토벌대의 중산간 초토화작전으로 제주에서 4.3사태가 평정될 즈음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침공으로 야기된 한국전쟁은 제주도를 또다시 죽음의 섬으로 돌려놓았다.

전황이 악화일로를 걷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을 실시해 과거 좌익전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애매모호한 혐의를 씌워 대대적으로 구금하기 시작했고, 제주에서도 과거 좌익활동(제주에서는 3.1사건 및 4.3 관련 재판을 받거나 수형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했던 사람들을 자수시켜 만든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제주는 이 같은 예비검속 바람이 어느 지역보다 거세게 불어 군.경.우익단체에 한 번이라도 잡혀가 기록이 남겨졌던 모든 사람들을 검속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무차별 검속…무고한 농민까지

검속대상자 중에는 해방 직후 각종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석방됐거나 사상활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 4.3 전후로 무고(밀서)에 의해 검속됐던 사람들도 포함됐다.

또 4.3 당시 토벌대도 무섭고 인민유격대도 두려워 산야를 헤매다 정부의 약속을 믿고 귀순한 후 조용히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마저 예비검속을 피하지 못했으며 애매한 밀서(무고)에 의해 검속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이는 치안국장 명의로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하달된 지시문을 통해 요시찰인 전원을 즉각 구속하라는 것이었으며,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계엄사령관이 예비검속을 주관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조직된 보도연맹원 수는 1949년 11월 말 현재 5283명으로, 서울.경기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였으며 이 수는 계속 증가해 1950년 6월 한국전쟁을 전후해 2만7000여 명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정부는 이들을 당시 대부분 인민유격대에 단순 동조하거나 협박에 못 이겨 입산, 혹은 부역한 사람들로 여겼으며, 실제로 많은 귀순자들이 군.경의 엄격한 심사에 의해 석방됐던 것이다.

4.3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와중에 정부의 약속을 믿고 귀순해 석방됐던 3만여 명에 가까운 양민들이 또다시 정부에 의해 관리대상으로 지정될 정도로 위험한 사람들이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이는 인민군이 경남.부산 지역을 점령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미리 제주도를 반공기지로 삼고자 예비검속자에 대한 신속한 처리가 정부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6월 말부터 8월 초에 이르기까지 공무원, 교사에서 학생과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예비검속이 이뤄졌는데 당시 경찰공문서에는 예비검속자 수가 820명이라고 기록돼 있고, 미국대사관 직원의 보고서에는 경찰이 1120명의 포로들을 제주도에 억류하고 있는데 이 중 국민보도연맹 임원 700명을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제주도 경찰당국은 이들 검속자에 대해 범죄 경중 급별 심사를 벌여 A, B, C, D급으로 분류한 후 계엄사령부로 이관했다. 이들 예비검속자는 인민군이 남하해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던 7월 말부터 8월 하순까지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경찰서에 검속된 자들로, 이들에 대한 군 당국의 총살은 아주 극비리에 수행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유시사항을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로 할 정도로 정부는 보안 유지에 철저를 기했다.

이 중 모슬포경찰서 관할 수용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이 모슬포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총살된 현장은 우연히 마을 주민들에게 발각됐지만 나머지 제주.서귀포경찰서에 검속됐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희생 일시와 장소 등 당시 상황이 철저히 기밀로 처리됐다.

이 때문에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유가족들은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시신 암매장 장소는 물론 사망일조차도 몰라 애를 태우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제주경찰서 관할구역에서 이뤄진 예비검속자 및 총살희생자 수는 관련 기록이 전무한 상황이다.

제주·서귀포경찰서 관련 기록 전무
유족들 시신 암매장 장소도 몰라


또 예비검속자의 시신을 수습한 유족이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제주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은 1950년 8월 4일과 19일 2차례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분석됐다.

8월 4일에는 제주경찰서와 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됐던 수백명을 제주항으로 끌고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했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에서 근무했던 장시용씨의 증언에 따르면 오후 9시께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해 알몸 차림의 500여 명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가 2시간 정도 지나서 빈 배로 돌아왔다.

또 8월 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던 예비검속자 수백명을 트럭에 싣고 제주비행장으로 끌고가 총살한 후 암매장했다.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도 관련 기록이 전무하고 시신을 수습한 유족도 전무하다.

그러나 대부분 서귀포 절간고구마창고에 수감됐다는 사실과 희생일 정도가 증언으로 확인됐다.

수감장소·희생일 확인 고작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은 7월 29일 15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보이며, 수감자 중 일부 생존자는 8월 12일 제주도 경찰국으로 이송된 후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된 것으로 추정됐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 수는 현존 경찰 자료가 남아 있어 실상이 파악됐다.

우선 예비검속자 수는 344명이었고 이 중 252명이 군에 송치돼 희생됐다.

이들 희생자는 모슬포경찰서 관할 절간고구마창고와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창고에 수감됐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1950년 8월 20일 새벽 대정면 상모리 섯알오름 굴 속에서 총살됐으며 이 사실을 확인한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군의 방해로 이뤄지지 못하다가 1956년에 61구, 1957년에 132구의 시신을 수습해 한림읍 금악리 만뱅듸 공동장지와 상모리에 백조일손지묘를 조성했다.

성산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 수와 총살희생자 명단이 현존 경찰 자료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당시 80명이 수감됐으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이 군의 총살 지시를 거부하고 6명만 군에 넘겼는데 7월 28일 오후 3시께 서귀포로 이송시킨 것으로 기록돼 이들 6명은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와 함께 7월 29일 수장된 것으로 추정됐다.

나머지 예비검속자에 대해선 문 서장이 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총살하지 않아 많은 도민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9월 이후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집행은 다행히 정지돼 1차로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153명이 석방되고 2차로 48명에 대한 석방이 이뤄졌으며, 서귀포경찰서 수감자도 전원 석방됐고 모슬포경찰서에서는 전체 검속자 344명 중 90명이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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