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 - (15) 한라산 금족령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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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후 9년 만에
한라산서 총성 멈춰


1949년 4월 군경토벌대의 중산간지역에 대한 ‘섬멸전’ 이후 무장대는 활동을 거의 못하고 있어 당국은 무장대들이 거의 소탕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한라산의 잔존 무장대는 60여 명 정도로, 이들은 되도록 교전을 피하고 무기를 감추면서 연고지에서 부모 형제들에게서 생필품을 보급받아 연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개월쯤 된 7월 25일 중문면 하원지서를 습격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 과정에서 무장대 지도부 3명이 무장대의 활동 재개를 반대했으나 허영삼, 김성규 등이 주동이 돼 3명의 지도부들을 살해하고 허영삼이 무장대 사령관이 돼 하원지서를 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장대는 간헐적으로 습격을 해왔고 경찰에 피해를 주거나 우익인사를 살해하는 등 북한 인민군의 제주도 상륙을 기대하며 활동을 유지해 왔다.

1952년 5월께 육군정보국 기록에 따르면 무장 30명, 비무장 35명 등 무장대 세력은 65명이고, 허영삼이 경찰에 의해 사살된 후 사령관은 김성규인 것으로 확인됐다.

1952년 9월 16일에는 무장대가 국군과 경찰을 가장해 제주방송국을 습격, 3명을 납치해 살해했으며 10월 31일에는 서귀포발전소를 전소시키는 등 폭도화됐다.

무장대 내부 갈등 심화…자멸 상태
경찰 1954년 9월 한라산 전면 개방
마지막 무장대원 오인권 1957년 붙잡혀


그럼에도 무장대는 내부 갈등이 심화돼 2개파로 나뉘어 서로 교전을 벌이는 등 무장대의 세력은 자멸 상태에 이르게 됐고 해병대와 육군특수부대의 작전 투입과 군경토벌대의 진압작전으로 무장대는 거의 궤멸돼 경찰은 1954년 1월 15일 잔여 무장대는 6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1명이 귀순하면서 한라산 잔존 무장대는 5명(김성규, 한순애, 정권수, 오원권, 변창희)으로 줄어들었다.

1954년 9월 21일 신상묵 제주도 경찰국장은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 한라산을 전면 개방하고 주민들의 성곽 경비도 철폐했다.

1년 후인 1955년 9월 21일에는 백록담 북쪽에 ‘한라산 개방 평화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5명의 무장대가 잔존함에 따라 경찰은 진압작전을 종결짓지 않고 흔적을 쫓았으며 신 경찰국장은 무장대의 가족을 직접 찾아가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귀순을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56년 4월 3일 무장대 부책임자인 정권수를 구좌면 송당리 체오름에서 사살함으로써 무장대 수는 4명으로 줄었다.

이후 무장대의 흔적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자 도 경찰국은 무장대 소탕임무를 각 경찰서로 이관했다.

1957년 3월 1일 제주경찰서 사찰유격대가 월평동 견월악 부근에서 대열에서 뒤떨어진 한순애를 생포하고 3월 27일에는 한라산 중턱 평안악 밀림지대에서 무장대 3명과 교전 중 총책 김성규 등 2명을 사살했다.

마지막 무장대 오원권도 4월 2일 성산포 유격대에 구좌면 송당리에서 생포됨으로써 한라산에서의 총성은 1948년 4월 3일 이후 9년 만에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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