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 장보고호 한·중·일 탐험기-② 서해 연근해 항로
뗏목 장보고호 한·중·일 탐험기-② 서해 연근해 항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물길 소용돌이치는 울돌목 지나
1200년 전 청해진 본영 완도 도착

모든 항로 장악 해상왕 자취 곳곳에


지난 4월 10일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 인천시민들의 열렬한 환송식을 뒤로한 채 장보고호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고대 항해가 그렇듯이 우린 한동안 육지에 상륙해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뗏목을 수리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적재했다. 만약 교역선이었다면 물건들을 팔고 다시 다른 나라로 가서 팔 화물들을 적재했을 것이다.

서해 연안 해역에는 안강망어선들과 양식장이 많아 뗏목 항해를 하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래서 우리 해경 경비정이 장보고호를 예인하면서 곳곳, 즉 고대 항해에서 중요한 항구지역과 유적들이 있는 곳에 기항하기로 했다.

일본 승려 엔닌이 타고 온 장보고선단의 배는 중국 산둥을 출항해 멀리 육지를 바라보면서 남으로 침로를 변경해 웅주계, 즉 옛 백제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해류와 조류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기만 해상세력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뗏목은 안흥량을 거쳐 당진, 서산을 지나 비를 맞으며 서천항에 도착했다.

이 항로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활용됐지만 기원을 전후한 시대에 동아지중해 교역권이 활성화되면서 중국지역과 일본지역의 배들도 오고가던 곳이었다. 후삼국시대에는 복지겸, 박술희 같은 해상세력들이 웅거하던 거점이기도 했다.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삼남에서 개경(개성)이나 한양(서울)으로 조운선들이 들려가던 곳이기도 했다.

서천은 금강하구에 있다. 660년 우리처럼 성산 앞바다를 출항한 13만 대군은 황해를 건너 일단 덕적도에 기항했다가 신라 병선과 함께 남진해 이곳 금강하구로 들어와 대규모 상륙작전을 개시했고 수도인 웅진(공주)을 함락시켰다. 뱃길과 항구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던 것이다. 산성, 당집 등을 답사하고 다음날 여명 무렵 장보고호는 다시 바다로 빠져 나갔다.

섬들을 보고 지나간다. 모양 자체도 아름답지만 망망대해에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뱃사람들에게 섬은 그 자체가 생명이고 빛이다. 고군산군도는 중국 산둥은 물론이지만 장난(江南)지방인 저장성(浙江省) 등에서 출항한 배들이 경기만으로 북상할 때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다. 고려에 온 북송의 사신인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현재의 영파를 출항, 주산군도를 떠나 흑산도를 경유해 바로 이곳 선유도 등이 있는 고군산군도를 지나 개경의 벽란도까지 가는 해도(항로)가 기록돼 있다.

뗏목은 변산반도의 위도 옆을 멀리 보면서 격포항으로 들어갔다. 부안 죽막동의 그 특이한 벼랑이 멀리서도 시커멓게 보인다. 환영행사를 마친 대원들은 모두 죽막동 수성당으로 갔다. 이곳에서는 제사와 관련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제.중국제.일본제 유물들이 골고루 발견됐던 동아시아 고대의 해양제사유적지이다. 뱃사람들에게는 뭍사람들이 모르는 불안을 해소하고 기원을 비는 그들만의 신앙이 있다.

제사를 지낸 탐험대는 다시 바다로 나와 남진한다. 섬들과 섬들 사이를 지나친다. 후삼국시대 때 능창이라는 해적이 활약했고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격돌한 바다이기도 하다. 그 시대는 진정 해양세력들이 역사의 주인이었다. 결국 최후의 승자인 경기만 해양세력인 왕건은 통일 고려를 세웠다.

우리는 4월 13일 거품과 소용돌이가 치는 울돌목을 어렵게 지나 보길도, 노화도 같은 크고 작은 섬들 사이를 돌아 완도에 도착했다. 이곳은 1200여 년 전에 장보고가 청해진의 본영을 두고 동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한 곳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장보고는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무역이 활발해지는 시대에 청해진을 이용해 그 주역이 되었다. 완도지역은 중요한 모든 무역로가 거쳐가는 물류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황해 중부를 건너와 남쪽으로 연안 항해를 해서 신라의 금성(경주)이나 제주도 일본열도로 가는 선박들, 중국 장쑤(江蘇)나 저장 지방에서 먼 바다를 건너온 선단들, 반대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려고 하는 선박들이 거쳐 갈 수밖에 없는 물목이었다. 장보고는 이곳에서 당나라에 살고 있던 재당신라인들, 재일신라인들, 본국신라인들을 하나로 조직화해 모든 항로를 장악했던 것이다.

본영이라고 알려진 장도는 만 안의 조그만 섬이다. 그 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나무기둥들이 뿌리만 남긴 채 일렬로 수백m나 박혀 있다. 성벽을 몇 년 동안 발굴하고 복원해 그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드넓은 바다를 항해해 들어온 내게 수십, 수백척의 배들을 정박시키고 관리하는 본영이라기보다는 동네 포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쩜 우리는 오랫동안 바다를 상실한 역사 탓에 마음마저 졸아들었는지 모른다.

이틀 동안 분주하게 섬 주변을 조사하는 한편 항해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찢어진 돛을 꿰매고, 중국제노를 완도노로 대체하고, 용골도 튼튼한 것으로 박았다. 4월 15일 장보고호는 제주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돛을 올린 채 옛 청해진을 출항했다.

<윤명철 동아지중해 종단 뗏목 역사탐험대 대장·동국대 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